한지(韓紙)가 예술의 복판을 차지했다.
지금 미술로 가장 뜨거운 도시, 이탈리아 베네치아 르네상스 고택(Palazzo Contarini Polignac)은 종이로 가득 차 있다. ‘한지 작가’로 유명한 전광영(78)씨의 부조 및 설치 작품 40점을 선보이는 비엔날레 공식 병행 전시가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전씨는 고서(古書)를 활용한 한지 조각 ‘집합’ 연작으로 세계적 명성을 일군 한국 미술의 대표 주자다. 그가 선보이는 한국적 독창성과 함께, 한지라는 소재의 생태학적 메시지로 인해 꼭 들러야 할 장소로 평가받으며 이 전시는 미술계의 지대한 관심을 얻고 있다.
전시의 가장 큰 특징은 작품(한국)과 공간(서양)의 적극적 융화다. 전시장은 15세기 중반 건축된 르네상스 양식의 3층짜리 고택으로, 프랑스 화가 모네가 두 차례나 그림으로 남겼을 정도로 유서 깊은 공간이다. 인위적인 구조물을 배제하고 장소와의 자연스러운 결합을 유도했다. 그 예로 옛 주인이 피아노를 치던 침실에 전씨의 대표작 ‘심장’이 뛰고 있다. 3m 너비 심장 형태의 대형 한지 조각 너머로 죽어가는 사람의 실제 심박 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이 소리가 방에 놓인 오래된 피아노로 인해 자연의 음율처럼 느껴진다. 연결되는 안쪽 방에 원형의 붉은 한지 부조 작품 ‘별’이 있다. 어둠 속에서 그것은 부활하듯 빛나고 있다.
한지는 숨 쉬는 종이이고, 그 환경친화적 내구성으로 인해 자체로 ‘생명’의 강력한 상징이다. 전시장에는 4m 높이까지 웃자란 버섯 조각 등이 도시 오염을 은유하며 솟아있는데, 이것이 나무와 숲을 포괄한 한지의 속성을 통해 치유의 가능성으로 치환된다. 기후 변화로 수몰 위기까지 겪는 ‘물의 도시’에서, 500년 된 낡은 집에서, 1000년 가는 종이가 예술의 형태로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전시는 한국(이용우)과 이탈리아(마누엘라 루카 다치오) 큐레이터가 공동으로 꾸렸다. 건축계 노벨상을 수여하는 프리츠커재단 수석 디렉터 마누엘라는 “작품과 건물과 도시가 하나로 연결되게끔 신경 썼다”고 말했고, 비엔날레 공식 병행 전시만 세 차례 기획한 이용우 큐레이터는 “인류가 직면한 재앙을 예술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고찰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전시 콘셉트에 맞게, 사용된 모든 자재는 100% 재활용된다. 플라스틱이나 못·접착제도 쓰지 않았다. 일종의 환경 실험인 셈이다.
그 연유로 이탈리아 유명 건축가 스테파노 보에리(66)가 전광영의 한지 작품에서 영감받은 건축물 ‘한지의 집’(Hanji House)은 현지에서도 특별한 관심을 끌고 있다. 보에리는 빌딩 발코니마다 나무 숲을 채워 넣는 일명 ‘수직 숲’으로 유명한 건축가다. 삼각 뿔 형태의 흰 외벽은 한지 염색처럼 자연광에 따라 표면의 빛깔을 달리하는데, 전시가 끝나도 종이접기 하듯 건물을 접어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도록 설계했다. 보에리는 “전광영과 나는 하나의 주제(자연)에 집착한다는 점에서 일심동체”라고 말했다. 11월 27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