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아타 '자연하다' 연작. 군부대 사격장(위 사진)에 빈 캔버스를 놓고 포탄을 발사해 찢어발긴 뒤, 이를 염색하고 다시 기워낸 작품이다. /모란미술관

별짓이 변신이 된다.

10년 전, 사진가로 한창 성공 가도를 달리던 김아타(66)씨는 돌연 화제를 전환했다. 카메라 대신 캔버스에 매달렸다. “전 세계를 돌며 순례하듯 사진을 찍었다. 죽을 고비도 넘겼다. 어느 순간 자연에 가 있었다.” 의미로 충만한 도시를 택해 2010년부터 빈 캔버스를 세워뒀다. 인도 부다가야, 일본 히로시마, 칠레 아타카마 사막…. 2년간 방치했다. 제주 바다 속에도 캔버스를 넣어뒀다. 풍화와 생식의 흔적이 얼룩으로 남았다. 자연이 그린 추상화였다. 지금도 각국 100여 곳에서 ‘자연하다’ 연작이 시간의 색을 흡수하고 있다.

그러나 해선 안 될 작업이었다. 김씨는 “너무 위험하고 힘들었다”고 말했다. 돈 되는 일이 아니었다. 전속 갤러리와 관계가 끊겼고, 컬렉터들에게도 배신자가 됐다. 인기 작가는 잊혔다. “미술계 친구들이 그러더라. 네 철학은 존중하지만 그만두는 게 좋겠다고. 하지만 지금껏 내가 작가로 살아온 방식은 깨진 독에 물 붓기였다. 새어나간 물은 어디론가 흘러가 길을 만들 것이다.” 폭탄도 퍼부었다. 4년간 국방부를 설득해 경기도 연천 포사격장 등지에 캔버스 천을 걸어놓고 대포를 쏜 것이다. “105㎜ 곡사포부터 유탄 발사기까지 미사일 빼곤 다 쏴봤다”고 했다. 너덜너덜해진 그것을 사체 수습하듯 줍고 다시 기워 폭력과 회복을 은유했다. “인간을 배제하고 어떻게 자연을 보여줄 수 있나. 야만의 역사도 자연의 일부다.”

김아타 작가가 미국 포틀랜드 숲에 설치한 빈 캔버스. /모란미술관
모란미술관 야외 공간에 세워둔 빈 캔버스 옆에 선 김아타. 앞으로 2년간 대기(大氣)의 붓질이 캔버스에 그림을 그릴 것이다. 작가는 “내게 자연은 동사(動詞)”라고 말했다. /정상혁 기자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2년간 세워둔 캔버스. 그곳의 토양이 선물한 색과 문양을 얻었다. /모란미술관

김아타가 진행 중인 10여 년의 예술 실험 ‘자연하다’가 경기도 남양주 모란미술관에서 10월 19일까지 펼쳐진다. 그을리고, 좀먹고, 그러나 강렬한 이미지 10여 점이 놓여있다. 성파 스님이 지어준 법명 아타(我他·나와 너)의 뜻처럼, 행위와 무위가 구분되지 않고 하나의 결과로 승화된 작품들이다. 지난 10년은 사실상 구도(求道)의 여정이었다. 김씨는 “봄이 죽어야 여름이 오듯 새 작업을 위해서는 전작이 해체돼야 했다”며 “굳이 예술로 이해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했다. “국제우주정거장에 캔버스를 세우려고 NASA(미 항공우주국)에도 협조를 구하고 있다”는 그는 이번 전시를 위해 미술관 뒤뜰 벚나무 밑에도 빈 캔버스를 세웠다. 나무 그늘이 빈 칸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앞으로 2년간 여기서 늙어갈 것이다.

사진을 버린 게 아니다. “경기도 여주에 작업실 겸 전시장을 짓기 위해 과수원 땅을 조금씩 사모았다. 봄이 되자 복숭아꽃이 일제히 피어났다. 도저히 그냥 벨 수가 없었다.” 그는 지난달 카메라를 들고 복숭아꽃의 초상을 일일이 찍기 시작했다. 10만 컷의 얼굴이 모였다. 내년쯤 전시장이 완공되면 거기에 이 사진을 전부 걸어 무릉도원을 꾸밀 예정이다. “사라짐을 부활케 하는 것, 그게 내가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