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무(無)에서 시작한 미술관.”
서울 부암동 210-8번지, 산마루에 어렵사리 땅을 구했다. 김환기(1913~1974)의 그림처럼 한국적 자연과 밀접한 터였다. 3년에 걸쳐 주변 땅을 조금씩 사 모았다. 기공식날 “막걸리, 돼지머리, 시루떡 차려놓고” 간절히 고사를 지냈다. 완벽한 출발은 요원할 것이므로 “우선 방 하나 둘이 되는 것을 기다려서” 부분 개관을 단행했다. “공부하면서 연구하면서 실수를 거듭하면서” 시작한 환기미술관이 올해 개관 30주년을 맞았다. 한국에서 가장 값비싼 화가 김환기의 분신이 이곳에 모여있다.
조경부터 조명까지 전반을 챙기며 미술관 건립에 매진한 부인 김향안(1916~2004) 여사는 ‘환기미술관을 세우면서–우리끼리의 얘기’를 미술관 개관 2년 뒤인 1994년 펴냈다. “미술관은 내용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집을 지었어도 그 안에 담긴 내용이 관람자의 마음을 울리지 못할 때 그 미술관은 아무것도 아니다…”로 시작되는 귀한 기록이다. 절판된 그 책이 최근 개정판 ‘미술관 일기’로 다시 발간됐다. 여사는 “미술관 일기는 이렇게 시작되어 계승자들에 의해서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썼다.
개관 30주년 기념전 ‘미술관 일기’도 7월 31일까지 열린다. 지금껏 열린 200여 회의 전시를 분석해 출품작 및 관련 사진·영상 등을 함께 구성해 미술관 역사를 돌아보는 기획전이다. 전반기 반(半)구상부터 후기 점화까지 김환기의 생애별 주요 작품부터 환기재단이 수여하는 ‘환기미술상’(Prix Whanki) 수상자 작품까지 망라했다. 십자구도 회화를 채 완성 짓지 않고 캔버스를 뒤집은 뒤 전면점화를 새로 그려 앞뒤로 그림의 변천을 보여주는 작품 ‘9-l-70 #140′(1970)도 볼거리다.
특별히 관람객 대상 ‘가장 인기 있는 그림’을 인스타그램으로 설문조사해 그 결과를 10점의 출품작으로 선보인다. 1위는 1055표를 얻은 ‘매화와 항아리’(1957). 미술관 개관을 응원하고자 김환기·김향안 부부의 프랑스 시절 지인(신재숙)이 기증한 작품이다. 그림 완성 당시 김환기에게 선물받아 줄곧 방에 걸어둔 애장품을 다시 제일 먼저 미술관에 건넨 것이다. 이후 이 그림은 1992년 개관기념전부터 내걸리며 30년간 미술관의 핵심 작품으로 소개되고 있다.
여러 조력자가 존재했으나, 결국 이곳을 지켜내는 건 관람객일 것이다. 방탄소년단 리더 RM 등 유명인부터 일반 시민까지 그간의 방명록을 함께 전시하는 이유다. 누군가 흰 종이 위에 “조용한 부암동의 별”이라 적어놓고 다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