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白旗)가 바람에 맞서고 있다.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세계적 행위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76)가 들판에서 백마를 탄 채 흰 깃발을 들고 있다. 아무 말 없이 바람이 불어오는 정면을 응시한다. 2001년 진행해 짧은 영상으로 남긴 단출한 퍼포먼스 ‘영웅’(Hero)을 그는 서울·뉴욕·런던 옥외 전광판에서 8월 31까지 20시 22분마다 상영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하려 21년 만에 다시 꺼내 든 것이다. 마리나는 본지 서면 인터뷰에서 “당초엔 고국의 건국 영웅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을 기리려는 목적이었다”며 “시간이 흘러 또 한번의 전쟁이 시작된 지금 우리에게 새로운 영웅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라고 했다.
마리나는 이와 함께 새 영웅관(觀)을 29행의 ‘영웅 선언문’으로 작성해 전 세계 언론에 배포했다. “영웅은 침묵을 이해해야 한다… 영웅은 영혼이 침투할 수 있는 침묵의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소리 없이 펄럭이는 깃발을 든 자신의 모습에 대해 마리나는 “고요함에는 강력한 힘이 있다”고 설명했다. 침묵은 격동의 바다 한가운데 버티는 섬과 같고 “그것은 항복이 아니라 평화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고요한 힘의 원천은 여성성이다. “여성은 폭력에 대항하는 다른 유형의 에너지를 지니는 것 같다. 이 세상을 밝힐 새로운 빛을 가져올 여성 지도자들이 더 필요하다.”
저게 뭐 하는 짓인가, 그런 행동을 미술 용어로 흔히 ‘퍼포먼스’라 일컫는다. 몸짓 혹은 상황만으로 의미를 발생시키는 일종의 무언극(無言劇)이다. 마리나는 지난 40여 년간 이 업계의 가장 유명한 인물로 군림해왔다. “퍼포먼스를 처음 선보였을 때, 그러니까 비물질적인 작업을 시작했을 때, 갤러리나 박물관에 팔 수 있는 건 전무했다. 다들 ‘이건 말도 안 된다’고 했다. 돈 되는 게 없다고, 정신병원에 보내야 한다고.” 이후 2010년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두 달 넘게 선보인 ‘예술가가 여기 있다’(The Artist is Present)로 명실상부 스타덤에 올랐다. 관람객과 일대일로 마주 앉아 1분 가까이 그저 말없이 서로 바라보기만 하는, 그럼에도 펑펑 눈물을 쏟는 관람객이 속출한 전무후무한 쇼였다. 마리나는 이 우크라이나 성금 모금을 위해 이 작품을 지난 4월 미국에서 재연했다. “관람료로 모은 15만달러(약 2억원)는 최근 우크라이나로 보냈다”고 했다.
조용히 응시하기, 이것이 세상을 바꾸는 첫걸음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에너지가 모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어디서든 또 일어날 것이다. 중요한 건 이 폭력을 멈추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영웅이 될 이들을 독려하는 것이다. 기부도 그 일환이다. 그들이 미래이기 때문이다.” 그와 마주 본다면 푸틴도 감동을 받을까? 마리나는 “나는 푸틴에게 감동을 주려고 자리에 앉아있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나는 그의 마음을 열기 위해 거기 있을 것이다.”
말은 쉽지만 그의 퍼포먼스는 고통에 가깝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매일 8시간 넘게 앉아 있는 ‘예술가가 여기 있다’뿐 아니라, 서울 소마미술관에서 8월 7일까지 영상으로 전시되는 ‘정지 에너지’(Rest Energy)역시 마찬가지다. 시위 당겨진 살상용 화살을 자신의 심장에 겨눈 채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대단히 위험한 퍼포먼스다. 마리나는 “내 예술의 핵심은 시간”이라고 말했다. 고통이 아니라 그것을 견디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퍼포먼스가 두세 달씩 이어지기도 한다. 그럼 공연이 삶 자체가 돼버린다. 뭔가를 바꾸기 위해 오늘 당장 할 수 있는 일, 그것이 내게는 예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