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본지 인터뷰 당시 이남덕 여사 뒤쪽으로 이중섭의 연필 자화상이 보인다. /이종현 기자

“이미 화백과 천국에서 재회해 둘이 사이좋게 서귀포의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고 계실 것 같습니다.”

국민 화가 이중섭(1916~1956)의 아내이자 이중섭 예술 세계의 거대한 축이었던 이남덕(101·야마모토 마사코) 여사가 지난 13일 일본 현지에서 별세한 사실이 30일 확인됐다. 유족 측은 최근 일부 한국 미술계 지인에게 서신을 보내 “여사는 천수(天壽)를 누렸다고 생각한다”며 “장례식은 가족만 참석한 가운데 18일 도쿄 세타가야 기독교회 예배당에서 열렸다”고 부고 소식을 알렸다. 두 사람은 슬하에 두 아들(태현·태성)을 뒀다.

이 여사는 이중섭을 떠나보낸 뒤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10년의 추억으로 70년 가까운 세월을 버틴 것이다. 1938년 무렵 일본 문화학원(文化學園) 미술부에서 처음 만났다. 공용 세면대에서 붓을 씻으며 이중섭과 처음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1940년 연인으로 발전했다. 이중섭이 수없이 보낸 연서(戀書)가 그 증거다. 이중섭은 편지지 테두리를 ‘뽀뽀’(ポポ)라는 깨알 글씨로 채우고, 의지를 다잡기 위해 수시로 아내에게 약속한다. “화공 이중섭은 반드시 가장 사랑하는 현처 남덕씨를 행복한 천사로 하여 드높고 아름답고 끝없이 넓게 이 세상을 돋을새김해 보이겠어요.”

이중섭이 마사코에게 보낸 엽서화(1941년). 아내의 다친 발을 치료해 주는 이중섭의 실제 일화가 담겼다.

이 엽서 자체가 작품이다. 이중섭이 엽서에 그린 그림 중에는 발 다친 아내에게 약을 발라주는 이중섭의 실제 일화를 기록한 것도 있고, 신화 속 장면처럼 환상적이고 에로틱한 그림도 다수다. 최근 ‘이건희 컬렉션’ 기증품으로 대거 공개됐고, 지난해 일본 출판사 쇼가쿠칸(小學館)에서 두 사람의 일화를 다룬 책 ‘사랑을 그린 사람–이중섭과 야마모토 마사코’가 출간되기도 했다.

1944년 12월, 전운이 심각해지자 이남덕 여사는 “결혼이 급하다”는 이중섭의 전보를 받고, 홀로 대한해협을 건너 입국했다. 1945년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가는 마지막 관부연락선을 탔다고 전해진다. 부산에서 다시 기차를 잡아 타고 서울 반도호텔에 도착해 전화를 걸었다. 원산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이중섭의 손에는 삶은 계란과 사과가 한가득이었다. 여사는 최근까지도 “꿀 같은 사과 맛”과 “따스한 품”을 잊지 못했다. 둘은 원산에서 전통 혼례를 올렸다. 이중섭은 아내에게 한국식 이름을 지어줬다. ‘남쪽에서 온 덕이 많은 이’라는 뜻의 ‘남덕(南德)’이다.

두 사람이 1945년 원산에서 올린 전통 혼례 사진. /조선일보DB

이름처럼 이중섭에게 아내는 덕 그 자체였다. 경제관념이 희박한 남편을 대신해 여사는 거리로 나섰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남편 작품 속 모델이자 뮤즈로도 존재했다. 궁핍의 역사를 회고하면서도 이 여사는 그러나 원망 대신 “그림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고 두둔했다. 1951년 피란 통에 무일푼으로 내려간 제주도 서귀포 시절이 가족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마을 반장에게 얻은 4.6㎡ 남짓 단칸방에서 끼니를 위해 바닷게를 잡아 먹거나 배급 식량과 고구마로 연명하던 나날이었지만, 함께 모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림 속 가족은 행복해 보인다.

이듬해 부친상 등의 이유로 이 여사는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 갔다. 이듬해 이중섭이 선원증을 겨우 구해 일주일간 도쿄에 머물기도 했지만, 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여사의 도쿄 세타가야 자택 현관엔 최근까지도 이중섭의 작은 판화가 걸려 있었다. 안간힘 쓰며 서로 입맞춤하는 한 쌍의 닭 그림이다. 2016년 본지 인터뷰에서 이 여사는 “사실 내가 닭띠”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70년 만에 하늘에서 재회하게 됐다. 2016년 ‘이중섭 탄생 100주년’ 전시 당시 이 여사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과 함께할 거예요”라고 편지를 썼다. “우리는 운명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