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싱가포르·대만 등 아시아 각국이 미술계에서 ‘뉴 홍콩’이 되려 경쟁한다. 한국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겠느냐고? ‘예스’. 단, 20~30년 전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프리즈 서울’ 참석차 30일 방한한 리처드 암스트롱(73) 구겐하임 관장은 ‘아시아 미술 중심 국가’로서 한국의 가능성을 밝게 봤다. 1959년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나선형 구조로 설계해 미술관 건축의 문법을 바꿔놓은 뉴욕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 1997년 프랭크 게리가 물결 치는 듯한 형상으로 디자인해 쇠락한 철강 도시를 되살린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등 ‘구겐하임’은 20세기 미술관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암스트롱 관장은 2008년 뉴욕 구겐하임 관장에 부임한 뒤 14년 동안 빌바오·베네치아·아부다비(2025년 개관) 등 전 세계 구겐하임을 총괄하고 있다.
2010년 첫 방문 이래 10여년 동안 한국 미술계를 지켜본 그는 “프리즈가 진출하고, 해외 유명 갤러리들이 앞다퉈 문 연다는 사실은 한국이 아트 비즈니스를 하기 좋은 환경이 됐다는 증거”라고 했다. 암스트롱 관장은 “잘 정비된 미술품 매매 관련 세법, 작품 운반에 필수인 훌륭한 공항 등이 예술 비즈니스 무대로서 한국이 지닌 경쟁력”이라면서 의외의 강점 하나를 얘기했다. “한국 음식의 다양성과 환대 문화”였다. “농담이 아니다. 예술계에선 사교가 중요하다. 음식이 빠지지 않는다. 많은 결정이 레스토랑 ‘테이블’에서 이뤄진다. 미식(美食)은 중요한 예술 자본이다.”
미술관과 갤러리 난립, 미술 시장 과열은 경계할 것을 주문했다. 특히 미술관과 관련해선, “일본에서 20~30년 전 미술관이 우후죽순 생겼지만 지금은 거의 고사 상태다. 스페인과 중국도 이런 우를 범했다. 제대로 된 양질의 미술관 몇몇 곳을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20~30대 젊은 세대가 미술계의 동력으로 등장한 것은 한국만의 독특한 현상”이라고 했다. “세계에서 출산율이 제일 낮은 나라라는데, 우리 미술관에도 한국 20~30대 관광객이 굉장히 많다. 유럽 관람객보다 훨씬 젊고 구석구석 본다. 경제력을 바탕으로 해외여행을 많이 하고 취향까지 갖춘 한국의 젊은 세대는 적극적으로 예술을 즐기는 것 같다.”
지난해 BTS 리더 RM이 휴가 중 뉴욕 구겐하임에서 인증샷을 찍어 올리는 등 미술관 투어를 해 화제가 된 것도 이런 현상의 한 단면으로 받아들였다. 최근 RM이 언젠가 미술관을 열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고 하자, 웃으며 “미술관을 열면 미술을 즐기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정치인을 꿈꾼 그는 1960년대 워싱턴 정가의 한 상원의원 사무실에서 사환으로 일했다. 여름에 더위 피해 간 곳이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등 에어컨이 설치된 미술관이었다. 프랑스 유학 시절엔 겨울에 히터가 나오는 루브르박물관을 아지트 삼았다. 50~60년 전 그를 미술관으로 이끈 신문물이 냉난방 시설이었다면, 지금 세대를 미술관으로 이끄는 것은 ‘디지털’이다.
“요즘 관람객이 미술관에서 꼽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첫째도 둘째도 ‘재미(fun)’”라며 “새로운 관람객의 요구와 변화하는 예술 수용, 소장품 관리에서 디지털이 필수가 됐다. 우리가 취약한 분야인 첨단 기술을 잘 아는 파트너가 필요했다. 그게 LG였다”고 말했다.
LG는 지난 6월 구겐하임과 파트너십을 맺고, ‘LG 구겐하임 어워드’를 신설하는 등 기술과 예술의 접목을 후원하기로 했다. LG가 해외 미술관을 후원하는 것은 처음이다. 그는 “과거 일본 기업들이 해외 미술관 후원을 많이 했다면 지금은 한국 자본이 세계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게 사실”이라고 했다.
암스트롱 관장은 지난 2011년 뉴욕 구겐하임에서 개인전을 연 이우환을 비롯해 이불, 서도호 등 한국 작가와 친분이 두텁다. 그는 “최근 6~7년간 세계무대에서 한국 작가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며 “실험 정신과 테크닉, 특유의 공간감과 평온한 정서가 한국 작품의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구겐하임은 내년 9월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 특별 기획전을 열어 1960~1970년대 한국의 ‘실험 미술’을 집중 조명한다. “지금까지 구겐하임은 한국 고미술과 동시대미술 소장품은 많았지만 그 사이가 텅 비어 있었다. 아방가르드 전시는 이 둘 사이를 잇고 한국 미술을 이해하는 굉장히 중요한 챕터를 추가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는 “2년 뒤 개관하는 아부다비 구겐하임 컬렉션으로도 한국 미술품을 구입했다. 전시뿐만 아니라 소장품으로도 우리는 지속적으로 한국에 관심 뒀다”며 한국 사랑을 강조했다.
암스트롱 관장은 내년에 관장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두 달 전 공식 발표했다. 14년 장기 집권한 그의 퇴임 소식은 미술계 화제였다. 은퇴 이유를 묻자 “세상은 변했고 이젠 아래 세대가 더 많은 힘을 가져야 할 때”라고 했다.
미술관에서 보낸 세월 동안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은 단어는 “보통 사람(normal person)”이었다. “과거엔 미술관이 소수의 상위층 관람객에게 초점 맞췄지만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술을 잘 모르는 우리 어머니 같은 보통 사람도 흥미롭게 느끼는 전시를 어떻게 만들까 늘 고민했다.”
은퇴를 앞둔 ‘미술관 대부’에게 물었다. 미술관장이란? “미술관의 도어맨(doorman). 더 많은 사람이 미술관으로 들어올 수 있게 활짝 문 열어주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