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비행기 안 타도 여기 좋은 작품 많네요.”
아트페어 ‘프리즈 서울’(Frieze Seoul)이 열린 4일 코엑스 전시장, 런던 갤러리 리처드내기 부스 앞에는 200여 명의 대기 줄이 형성됐다. 오스트리아 화가 에곤 실레의 그림을 구경하려는 사람들이었다. 남녀노소, 유모차 부대도 여럿이었다. 수십억원을 우습게 호가하는 데다 국내에서는 볼 기회가 극히 드문 에곤 실레의 원화 및 드로잉이 대거 걸렸기 때문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존 에드워드 초상화 연구’), 앙리 마티스(‘녹색 숄을 걸친 누드’), 조르조 데 키리코(‘바닷가에 있는 말과 얼룩말’) 등 서양미술사 거장으로 진용을 완성한 아쿠아벨라 갤러리, 기원전 1000년 당시 제작된 황소 조각 등 고(古)미술로 꾸린 데이비드 아론 갤러리 역시 초만원이었다.
올해 처음 출범한 ‘프리즈 서울’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시장 분위기는 고조되고 있다. 이날 미국 화가 조지 콘도의 신작 ‘Red Portrait Composition’ 주변도 크게 북적였다. “통제가 필요해 보인다”는 볼멘소리가 나왔을 정도다. 국내 한 사립미술관이 지난 2일 개막과 동시에 구매(38억원)한 이 그림 바로 앞에는 이보다 더 비싼 루이스 부르주아의 대리석 조각이 놓여 있다. 갤러리 관계자는 “사진 행렬 탓에 조각품이 다칠 뻔한 위기가 몇 번 있었다”고 했다. 인구 밀도가 너무 심화되자 프리즈 측은 갤러리에 작품 보호 인력을 급파했다.
열기는 판매 실적으로 이어졌다. 개막 당일, 전체의 10분의 1 수준인 갤러리 13곳이 밝힌 판매가액만 200억원에 달한다. 참여 갤러리는 모두 119곳. 마크 브래드퍼드 그림(‘Overpass’)이 약 25억원, 게오르그 바젤리츠 작품(‘정오의 X-레이’)은 16억원에 팔리는 등 ‘억’ 소리 나는 거래가 속출했다. 나흘의 행사 기간을 감안하면 총매출은 수천억원대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역대 국내 최대 기록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 3일 프리즈 만찬장에서 “서울 종로구 송현동의 ‘이건희 미술관’ 부지를 내년 행사 개최지로 빌려줄 의사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트페어는 미술품을 파는 지극히 상업적인 공간이긴 하나, 세계적 브랜드 ‘프리즈’의 서울 진출이 현재 시장에서 가장 뜨거운 면면을 확보하는 시각적 풍요로 이어졌다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캐서린 번하드, 자데 파도주티미 등 국제적 신성(新星)을 본격 소개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한 갤러리스트는 “해외 아트페어에서만 경험할 수 있던 분위기”라고 평했다. 다만 피카소 ‘술이 달린 붉은 모자를 쓴 여자’(680억원)나 게르하르트 리히터 ‘촛불’(204억원) 등 호객의 큰 흥미 요소였던 초고가 거래는 성사되지 않았다.
‘프리즈 서울’과 공동 개최되는 토종 아트페어 ‘키아프’(Kiaf)는 관심도 면에서 열세였지만, 나름의 기획력으로 저력을 입증했다. 이를테면 갤러리신라는 부스 벽면에 바나나 30개를 테이프로 붙여 놨다. 2019년 ‘아트바젤 마이애미’에서 1억원에 팔리며 예술계를 뒤집어놨던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바나나(’코미디언’)를 패러디한 것이다. 바나나는 개당 3만5000원이지만, 구매자가 바나나에 예술적 가치를 부여할 경우 자유롭게 추가 요금을 낼 수 있다. 이준엽 디렉터는 “예술품의 가치를 되묻는 퍼포먼스”라며 “‘프리즈’라는 외적 팽창을 향한 일침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설치미술가 김수자의 작품으로만 부스를 채운 벨기에 갤러리 악셀페르포르트 역시 세련된 전시 구성으로 호평받았다. 또 학고재 부스에서 박종규 화가의 그림을 본 일본 21세기미술관 관계자가 “제일 인상깊었다”며 향후 전시 가능성을 띄운 것으로 전해진다. 입장객 및 대략의 판매액 수치는 전시 마지막 날인 5일 발표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