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신진 만화가 엘비스 딘은 지난달 그래픽노블 ‘Goats’를 발표했다. 예술성 짙은 만화 장르를 일컫는 그래픽노블에 어울리는 수준급 작화(作畵)로 각광받으며, 네이버웹툰이 북미에서 운영 중인 웹툰 플랫폼 ‘WEBTOON’에도 공개됐다. 그러나 만화 속 이미지를 그려낸 건 작가가 아닌 AI 기반 이미지 생성 프로그램 ‘미드저니(Midjourney)’였다. 해외에선 이 같은 ‘AI 만화’가 잇따라 출간·판매되고 있다.
AI 제작 이미지가 문화 전반으로 신속히 파고들고 있다. 이달에는 무명의 인도 건축가 마나스 바티아가 세계적 이목을 끌었다. 속 빈 거대한 고목 안에 주택이 아파트처럼 들어찬 초현실적 건축 개념도 때문이었는데, 상상의 뛰어난 재현성으로 CNN 등이 보도할 정도로 화제였다. 역시 미드저니로 만든 것이었다. 바티아는 “예술가는 예술을 위해 존재하는 모든 도구를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누구든 구현코자 하는 이미지를 문장으로 입력하면 1분도 안 돼 고품질의 그림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되면서, 시각 예술계가 요동치고 있다. 텍스트가 곧장 이미지로 전환되는 혁신은 ‘미드저니’ ‘달리’ ‘스테이블 디퓨전’ 등 AI 기반 이미지 제작 플랫폼이 촉발했다. 예를 들어 해당 온라인 사이트에 접속해 “반 고흐 스타일의 미래 도시”라고 입력하면, 인터넷상의 여러 이미지를 재조합해 결과물을 도출하는 서비스다. 원하는 그림이 나올 때까지 단어를 추가해 반복 수정할 수도 있다.
핵심은 예술성이다. AI 페인팅 기술의 역사가 10년에 달하면서 ‘감성의 영역’까지 발전했기 때문이다. 지난달 미국 콜로라도에서 열린 한 미술 대회 디지털 아트 부문에서 한 게임 제작자가 미드저니로 만든 그림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이 1등을 차지했다. 중세 유럽풍의 공간을 SF 영화의 한 장면처럼 풀어낸 그림이다. “로봇이 올림픽에 출전한 꼴” 등의 격앙된 반발도 나왔으나, AI가 발휘한 창의력이 인간의 예술성을 앞지른 이 사건을 뉴욕타임스 등 여러 외신이 대서특필했다. 암스테르담에서는 ‘AI 그림’ 전시도 열리고 있다.
지난 6월 저명 잡지 ‘이코노미스트’ ‘코스모폴리탄’이 AI로 만들어낸 이미지를 표지로 사용하는 등 상업적 활용 사례가 잇따르면서, 동시에 업계의 불안도 커지고 있다. 디자이너 세바스티안 에라주리주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어떤 직종이 가장 먼저 인공지능으로 대체될까? 만약 당신이 일러스트레이터라면 불행히도 바로 당신”이라고 말했다. “제대로 된 삽화를 만드는 데 사람은 약 5시간, 컴퓨터는 5초면 된다”는 것이다. 미국판 코스모폴리탄 6월호 표지에는 “이미지 제작에 20초밖에 안 걸렸다”는 문장이 적혀있다.
뉴미디어 작가인 이진준 카이스트 교수에 따르면, 예술 영역의 AI 발전 단계는 ‘단순 도구→생산성을 높이는 조력자→전문 협업이 가능한 협력자→독립 예술가’로 정리할 수 있다. 이 교수는 “현재는 ‘협력자’ 단계까지 도달한 상태”라고 말했다. 오랜 세월 예술에 요구되던 손기술의 중요성이 희미해지고 편집과 기획력, 그리고 이미지를 선별하는 미감(美感)이 핵심 경쟁력으로 부각되는 시점에서, 소규모 창작자를 위한 기회의 장이 열리고 있다는 긍정론도 나온다. 유명 작가들이나 가능했던 조수나 전문 장비 대신, AI가 새로운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