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마루 지나 안채에 들어서니 그림이다.
서울 정릉동 ‘한규설 고택’은 지금 설치미술가 빠키(Vakki)에게 아랫목을 내줬다. 의정부 참정대신을 지낸 한규설 대감의 130년 세월 한옥 안채·별채에 단청이나 보자기를 연상시키는 빠키 특유의 형형색색 조각과 그림이 설치돼 있다. 지난 22일 새단장을 끝내고 개관한 이곳은 국민대학교가 ‘명원박물관’으로 신규 조성한 전시장이다. 발랄한 현대미술과 한옥의 정적인 분위기가 묘한 조화를 이룬다. 한국계 캐나다 작가 쌔미리의 인공지능 기반 영상 작품도 마루에 놓여 경관과 반응하고, 장독대 옆에는 빠키의 방석 작품을 깔아놨다. 관람객은 여기 앉아 이 생경한 풍경을 천천히 누릴 수 있다.
한옥이 새로운 전시 공간으로 각광받고 있다. 동·서양, 신·구의 조화를 통한 참신한 큐레이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연 풍광을 감상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한옥의 ‘차경’(借景) 역시 매력의 일부다. 60칸 규모의 한규설 고택 옆에 올해 완공한 신축 한옥도 전시 용도로 들어섰다. 이곳에 영국 대표 화가 브리짓 라일리의 ‘옵 아트’(착시를 노린 추상화) 작품이 놓여있는데, 한옥의 ‘ㅁ’자 구조를 이용해 바깥 중정에서 열린 창문을 통해 집 내부의 그림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김승민 큐레이터는 “한옥이라는 우리 전통 건축물을 캔버스 삼아 현대 예술의 최전선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했다. 전시는 11월 13일까지 열린다.
12대 국회의장을 지낸 운경 이재형이 기거한 ‘운경고택’은 지난 4월부터 두 달간 설치미술가 최정화를 앞세운 현대 미술 전시 ‘당신은 나의 집’을 개최했다. 서울 사직동 도정궁(都正宮) 터에 1920년대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고택은 운경 선생이 6·25전쟁 휴전 직후 매입해 기거한 곳이다. 플라스틱 바구니·양동이 등 번쩍거리는 일상의 고물을 쌓아놓은 설치작과 거대한 채소 형상의 풍선 작품으로 300평 규모의 고즈넉한 경내가 팝아트적 장소로 돌변했다. 운경재단 측은 “삶의 공간이던 고택에서 각 공간의 쓰임새와 어우러지는 일상의 공예품을 활용한 예술 작품이 근대사(史)와 개인의 역사가 만나는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고 설명했다. 미술 전시로 인해 고택이 과거분사에 머물지 않고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이유로 전통 한옥이 다수 남은 서울 종로 일대에는 한옥을 전시장으로 용도 변경하는 경우가 잦다. 창성동의 20평 남짓한 낡은 한옥을 탈바꿈한 ‘창성동 실험실’, 역시 20평 규모의 화동 ‘가고시포 갤러리’, 1940년대 한옥을 개조한 가회동 ‘갤러리 한옥’ 등이다. 규모는 협소하나 기성 화단에서는 접하기 힘든 실험적 시도나 국내 신진 및 중견 작가를 소개하려는 취지다.
1908년 지어진 북촌 한옥을 프라이빗 갤러리로 조성한 ‘이음 더 플레이스’는 컬렉터 및 소규모 고객에게만 개방하던 공간을 올해부터 일반 개방(예약제)으로 전환했다. “저변 확장을 위해” 신진 작가부터 거장까지 기획전도 꾸준히 개최했다. 지난주까지 김환기·이우환·김춘수·최영욱 등 유명 작가로, 다음 달에는 신진 작가 8인으로 꾸린 단체전을 진행한다. 특징은 ‘느린 관람’이다. 마당의 감나무에서 딴 홍시 등으로 관람객에게 1인 다과상을 제공하는 이유다. 김새슬 큐레이터는 “느긋하게 작품을 둘러본 뒤 느낌을 나누고 정리하는 행위까지가 관람이라고 생각한다”며 “한옥은 그런 여유와 느림을 자연스레 권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