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르 도하에서 1시간 반, 승용차를 사막용 SUV로 갈아타며 북부 사막에 내렸다. 햇빛이 모자를 뚫고 머리에 꽂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지평선 위로 뭔가 반짝였다. 24일(현지 시각) 늦은 오후, 아이슬란드계 작가 올라푸르 엘리아손의 설치미술 ‘그날의 바다 위를 여행하는 그림자들’이 등장했다. 첫 소감은 경외였다.
지름 10.51m의 거대한 거울 원반 19개가 세상을 뒤집어 비췄다. 사막으로부터 4.53m 높이 강철 링 위에 설치한 거울이다. “거울을 올려다보면 땅에 발을 디디고 선 자신이 제3자의 시선에서 보입니다.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것 같죠. 링과 거울은 다시 한번 온전한 원으로 세상과 이어져요. 위태롭게 연결된 우리들처럼요.” 작품 완성에 7년이 걸렸다는 엘리아손이 말했다. 내달 20일 개막하는 FIFA 월드컵 기간엔 관람객을 위한 셔틀이 도심과 사막을 오간다. 엘리아손의 작품과 함께 자리 잡은 에르네스투 네투(브라질), 시몬 파탈(미국)의 사막 설치 미술에 다다르기 위해서다.
월드컵을 앞둔 카타르는 지금 곳곳에 세계적 거장들의 작품을 전시한 커다란 미술관이다. 카타르 박물관청 압둘라흐만 이샤크 공공미술 국장은 “지난해까지 40점을 설치하고 올해 40점을 추가했으며 연말까지는 100점이 된다”고 했다.
도하 하마드 국제공항에 내리면 높이 7m의 노란 곰 인형이 제일 먼저 손님을 맞는다. 스위스 출신 시각예술가 우르스 피셔의 조각. 루이 부르주아의 거대 청동거미 ‘마망’, 데이미언 허스트와 키스 해링 등의 작품을 지나 도하 도심으로 들어가면 지난주 설치된 높이 31m 의 황금빛 듀공이 하늘을 헤엄치는 듯한 모양으로 인사한다. 듀공은 일종의 바다소. 논쟁적이고 값비싼 미술가 제프 쿤스의 작품이다. 세계에서 둘째로 듀공이 많은 나라인 카타르는 멸종위기 해양 포유류에 대한 경각심을 작품으로 일깨운다. 이런 사회적 메시지 역시 공공미술의 역할이다.
월드컵과 문화예술은 카타르가 미래를 위해 갈고닦는 야심찬 ‘소프트 파워’의 두 축이라 할 수 있다.
카타르는 지난 2008년 석유 이후 시대를 대비하는 경제 다변화 플랜 ‘비전 2030′을 내놓았다. 문화와 교육 투자가 핵심이다. 작년 1인당 GDP 가 8만달러가 넘는 세계 5위 부자 나라는 이집트나 튀르키예 같은 전통의 문화유산 없이도 스스로 문화 강국이 되기 위해 미술품 수집과 박물관 건설이라는 지름길을 택했다.
국왕의 여동생이자 국립 박물관청 이사회 의장인 셰이카 알 마야사(39) 공주가 문화 강국 드라이브를 이끈다. 연 미술품 구매액이 10억달러를 넘는다고 블룸버그가 보도했던 세계 미술계 큰손. 22~27일 세계 20국 45명의 기자를 초청해 월드컵을 앞둔 카타르의 문화예술 인프라와 준비 상황을 공개한 것도 그가 이끄는 박물관청이었다.
공주는 과거 인터뷰에서 ‘수십년 뒤엔 지금 뉴욕이나 파리에 그림을 보러 가듯 도하에 오게 되길 바란다’는 취지로 말하곤 했다. 미국 듀크·컬럼비아, 프랑스 시앙스포 등에서 공부하며 국제적 안목을 쌓은 그는 추진력 강하고 거침없다. 2013년부터 뉴욕타임스와 공동으로 ‘내일을 위한 미술’ 포럼을 지속적으로 열며 세계 예술계 최고의 두뇌들과 교류했다. 지금 카타르의 박물관에는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 퐁피두 센터 등에서 온 현장 전문가와 각 분야 뛰어난 학자들이 최고 대우를 받으며 콘텐츠를 채우고 있다.
박물관 건물 자체도 예술품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장 누벨이 설계한 국립 박물관은 꽃잎을 여러 겹 겹쳐 놓은 듯한 외양의 ‘사막의 장미’로 널리 알려졌다. 이달 5일 재개관한 이슬람 예술 박물관은 루브르 피라미드의 설계자 이오밍 페이의 작품. 옥빛 물 위에 뜬 보석 같은 겉모습 만큼이나 내부 컬렉션도 야심차다. 자국 역사 위주인 카이로나 이스탄불과 달리 인도 등 서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까지 포용한다. “이슬람 문물에 관한 한 영국 박물관이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견줄 만하다”는 자부심도 크다.
문화예술에 관한 유연함도 놀랍다. 2030년 개관 예정인 루사일 미술관 소장품을 미리 소개하는 프리뷰 전시관엔 유대인 화가 마르크 샤갈의 ‘아라비안 나이트의 네 가지 이야기’ 연작이 대표작으로 전시돼 있었다. 이슬람 예술 박물관은 아랍의 숙적인 이란의 페르시아 문화 유물까지 태연히 상설 전시한다. 오랜 전쟁으로 고통받는 바그다드를 기억하기 위한 특별전도 진행 중이다. 이슬람 문화권 전체를 아우르겠다는 야심이 느껴지는 레퍼토리다.
레바논 미술 전문지 ‘캔버스’의 아말(44) 기자는 “카타르는 최고의 미술품을 사들이고, 최고의 건축가·전문가·예술가를 불러들여 자기 색깔의 문화를 구축해 가고 있다. 10년, 20년 시간이 쌓일수록 더 무섭게 성숙해질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