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병뚜껑을 줍는다. 납작하게 편다. 꿰매 잇는다. 색과 무늬가 광휘를 드러내는, 이른바 ‘광물의 카펫’이 탄생한다. 한 땀 한 땀 연결돼 건물 한 면을 덮을 정도의 거대한 크기로도 확장한다. 아프리카 가나 출신의 세계적 설치미술가 엘 아나추이(78)를 대표하는 병뚜껑 연작이 한국을 찾았다. 서울 삼청동 바라캇컨템포러리에서 29일부터 내년 1월까지 3점의 대형 신작을 선보인다.
병뚜껑은 모두 술병에서 나왔다. 1990년대 후반 공터에서 우연히 위스키 병뚜껑 포대를 발견한 것이 시작이었다. 작가는 여기에 고국의 근현대사를 대입했다. 사탕수수 재배에 아프리카 노예가 동원됐고, 사탕수수 당밀로 만든 술이 서아프리카 해안으로 선적돼 노예와 물물교환됐던 식민지 시대를 환기하는 동시에, 동시대 아프리카 문화에 깊이 뿌리내린 서구 문화의 충격을 은유하는 소재가 된 것이다. 새로운 조형 언어의 실험성을 인정받아 아나추이는 2015년 베네치아비엔날레 황금사자상(평생공로)을 수상했다.
그래서 병뚜껑 조각은 얼핏 아프리카 지도처럼 보인다. 직선의 테두리가 서구 패권이 마음대로 그었던 제3세계의 국경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혼자 작업하면 작품 하나에 수년이 걸리는 노동집약적 과정이지만, 마을 주민 30여 명이 팀을 이뤄 병뚜껑 수만 개를 모으고 나르는 협업이, 개인성을 초월해 역사적인 행위로 작품의 의미를 확장한다고 작가는 주장한다. 무역에서 비롯한 병뚜껑이 모여 인간과 시간의 ‘연결’을 은유하는 것이다.
폐품도 예술적으로 꿰매면 보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작품가(價)가 20억~30억원에 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