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에 한국 미술이 발아했다.
민들레꽃 형태의 높이 12m짜리 대형 조각이 카타르 수도 도하에 들어섰다. 한국 설치미술가 최정화(61)씨의 작품(Come together·다 함께)으로, 월드컵 개최를 기념해 카타르 정부가 직접 주문한 것이다. 냄비·헬멧·축구공 등 현지 주민들이 쓰던 일상의 집기를 쌓아올린 이 작품은 에듀케이션시티 앞에 영구 설치됐다. 최씨는 지난 10월 카타르재단과의 인터뷰에서 “경기장을 짓는 데 기여한 이들을 상징하는 여러 물건으로 구성했다”며 “감사 표시이자 그들의 역할이 지속적으로 눈에 띌 수 있도록 의도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제막식에 국왕 모후가 참석해 작품에 사인하는 등 성대한 축하연도 벌어졌다. 한국 미술을 향해 축포를 쏘아 올린 것이다.
낭보는 또 있다. 카타르 국립박물관 측이 개관 이래 첫 한국 작가와의 개인전 개최를 논의 중인 것으로 본지 취재 결과 확인됐다. 해당 작가는 한국 고유의 소재를 바탕으로 세계적 명성을 떨친 설치미술가다. 한 미술계 관계자는 “지난해 가을부터 협의를 시작해 월드컵 폐막 후 본격적으로 세부 사항을 조율하기로 했다”며 “내년 가을쯤 윤곽이 나오면 공식 발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사막 장미의 건축미로 유명한 카타르 국립박물관은 2019년 개관했고,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어 컬렉션을 확장하고 있다. 이 건물은 한국 현대건설이 준공했다.
최근 월드컵 및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의 방한 등으로 진한 돈 냄새를 풍긴 중동 시장이 한국 미술에도 큰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 20일 아랍에미리트(UAE)에서 폐막한 아부다비 아트페어는 역대 가장 많은 한국 갤러리(6곳)에 참가 자격을 부여했다. K팝이 촉발한 한국 문화에 대한 호감 증대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갤러리이배 관계자는 “디렉터가 최대한 다양한 작가를 요구해 새 얼굴 위주로 출품작을 선별했다”며 “문화적 다양성 강화에 신경을 쓴 것 같다”고 말했다.
제약이 많은 시장이다. 전제군주제라 왕가(王家) 인물을 그린 게 아니면 초상화가 팔리는 경우는 드물고, 누드 등 파격적 작품도 소외된다. 전략이 필요한 이유다. 10년째 이 페어에 참가한 이화익갤러리는 동양화가 허달재의 매화 그림, 차영석의 매 그림, 김덕용의 자개 풍경화 등 한국적 색채가 진한 작품으로 승부해 성공을 거뒀다. 매는 UAE의 국조(國鳥)이고, 왕족이 꽃 그림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간파한 까닭이다. 형상이 없는 단색화 계열의 추상화도 스테디셀러다. 그러나 변화도 감지됐다. 올해 처음 이 페어에 참가한 한국 칼리파갤러리가 관람자 위치에 따라 화면이 북한 김정은에서 미국 트럼프로 변화하는 이영하 화가의 이중 초상화(트럼프&김정은)를 판매해 불문율을 깬 것이다. 갤러리 관계자는 “중동의 부호들도 블루칩 작가를 찾는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미디어아트 작가 이이남, 도자회화 작가 오만철 등이 최근 사우디에서 잇따라 개인전을 여는 등 인기는 꾸준히 느는 추세다. 그러나 대대적 진출은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최근 한국화랑협회는 국가대표 아트페어 키아프(KIAF)의 아부다비·두바이 개최를 타진했지만, 결국 접기로 했다. 황달성 회장은 “현지 기획자 초청 등을 통해 자체 조사를 진행했다”며 “왕족의 구매력은 있지만 아직 미술 대중화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판단이 섰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