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팝아트 작가 무라카미 다카시가 자신의 신체를 그대로 본뜬 조각을 기괴한 좀비로 꾸며낸 최신작. 옆에는 그의 애완견 '폼' 좀비도 있다. /정상혁 기자

여덟 살 소년은 미술이 지루했다. 부모 손에 이끌려 도쿄의 한 미술관에 갔을 때였다.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그림을 보게 됐다. 그리스 신화 속 크로노스가 자기 자식을 뜯어 먹는 장면이었다. 당시의 충격은 지워지지 않는 신념으로 자리 잡았다. ‘헉’ 놀라지 않으면 그 예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일본을 대표하는 팝아트 작가 무라카미 다카시(61)는 기괴한 것에 빠져들었다.

부산시립미술관에서 27일 개막하는 대규모 회고전에는 그가 부려놓은 요괴로 가득하다. 불교 오백나한을 특유의 익살스러운 만화적 필체로 그려낸 ‘붉은 요괴, 푸른 요괴와 48나한’(2013)부터, 영국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인물화를 도깨비처럼 일그러뜨린 ‘프랜시스 베이컨에 대한 오마주’(2017), 53마리의 조그마한 괴물 조각(2013)까지…. 분홍 요괴 캐릭터 ‘쿠라케보’ 털모자를 쓴 채 26일 전시장에 나타난 다카시는 “누구나 공포가 있고 거기에 실체를 부여하면 몬스터가 된다”며 “좋든 싫든 잊고 있던 기저의 감정을 깨닫게 한다”고 말했다.

2017년작 '프란시스 베이컨에 대한 오마주(이사벨 로손과 조지 다이어의 두상에 대한 연구(밝은 배경)'. /김동환 기자
만화적 캐릭터를 일그러뜨려 기괴한 요괴처럼 표현한 그림 ‘727 둠 다다’(2017~2020). /김동환 기자

이윽고 스스로까지 괴물화(化)했다. 이른바 ‘무라카미 좀비’(2022)다. 작가의 몸을 그대로 조각으로 재현한 뒤, 살가죽을 벗기고 정수리에는 칼까지 꽂아놨다. 수위가 높아 지면에 싣지 못한 점 양해해주시길. “내 나이 환갑이 지나니 조금은 좀비가 된 느낌”이라는 농담처럼, 절반은 장난으로 시작됐다. “내 신체를 똑같이 본뜨는 스캔 기술이 있다기에 흥미로웠다. 다 만들어놓고 보니 별 재미가 없더라. 그래서 내장도 터뜨려보고, 죽은 반려견(폼)도 좀비로 바꿔봤다.” 대충 만들지는 않았다. “제작에 5~6년이 걸렸다.”

일본 ‘오타쿠(御宅)’ 문화를 현대미술 최전선에 올려둔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은하철도 999′ ‘미래소년 코난’ 등에 감화된 이 오타쿠 작가는, 만화·애니메이션 등 서브컬처야말로 일본 문화의 우수성을 드러낸다는 각성에 바탕해 과장된 귀여움을 피력하는 ‘상품’을 추구해왔다. 웃는 꽃(코스모스) 캐릭터로 잘 알려진 ‘카와이’ 스타일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귀여움의 이면에는 전후(戰後) 일본 사회의 미성숙함을 향한 비판이 자리한다. 기괴함의 뿌리는 거기에 있다.

26일 전시장에서 만난 무라카미 다카시. 자신이 창조한 요괴 캐릭터 모자를 여럿 지니고 다니며 매 행사마다 바꿔 쓴채 등장했다. /김동환 기자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의 영향도 컸다. “부모를 잃고 우는 어린애가 방송에 나왔다. 마을 주민이 아이에게 ‘엄마는 별이 됐다’고 설명하더라. 그 순간 나는 종교가 시작되는 순간을 목격한 것이다. 너무 괴로울 때는 스토리를 제공해 패닉에 빠진 정신을 진정시켜야 한다. 그것이 종교다. 대지진 이후 100미터짜리 ‘오백나한도’를 그렸고, 요괴와 아이들의 모험담을 영화 ‘메메메의 해파리’로 제작했다. 스토리가 있는 예술로 전환한 것이다.” 그의 그로테스크 미학은 재앙의 현실을 상기한다. 이번 전시를 주선한 화가 이우환이 “얼른 보면 유머러스하지만 다시 보면 독이 있다”고 평한 이유다.

영화 ‘메메메의 해파리’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조각으로 옮긴 ‘이가이가린’ ‘가게로군’(왼쪽부터).

전 세계를 누비며 영향력을 확산하고 있다. 지난해에도 F1 레이서 루이스 해밀턴, 가수 포스트 멀론 등과 협업을 진행했고, NFT 판매까지 뛰어들었다. 직원 200명을 거느린 공장식 창작 시스템 덕에 ‘상업 작가’라는 비판은 오랜 꼬리표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 나온 그림 ‘과소유’(2010)는 의외다. 캔버스에 ‘貧’(가난할 빈)자가 두 개 겹쳐있다. “사실은 유명 서예가 이노우에 유이치의 글씨다. 평생 ‘貧’자를 써서 큰돈을 벌었다. 그런 현상을 바라보며 과거의 미대생으로서 느꼈던 자괴감을 표현해봤다.” 잡아먹히지 않으려 내면의 요괴를 직시하는 결기처럼 읽힌다.

환호와 혹평이 공존한다. “‘아트’의 문턱을 낮춘 공헌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혹자는 내가 좋지 않은 풍토를 퍼뜨렸다고도 한다. 나는 그저 즐길 만한가, 앞으로도 이런 미술이 필요한가, 관람객의 판단을 기다리는 입장이다.” 3월 12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