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흉물이 아니다

정재호 2022년작 유화 ‘모습’(194×130.3㎝). /초이앤초이 갤러리

동양화가 정재호(52)씨는 서울의 쇠락한 건물을 그려왔다. 낡은 아파트는 한국 현대사(史)의 그늘 같은 것이었다. 사회 비판적 맥락을 늘 동반했다.

그러나 지난해 철거된 세운상가 일대 을지로 골목에서 정씨는 풍경으로서 존재하는 골목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사람을 만날 때도 첫인상과 선입견이 있다. 하지만 자주 만나다 보면 다른 면모를 알게 되잖나. 특정 코드로만 접근하면 선별적으로 보게 된다. 사실 아무도 을지로를 풍경 자체로 바라보지 않는다. 한국 현대미술에서 풍경으로 대접받지 못한 이곳을 풍경화라는 풍부한 볼륨으로 담아내고 싶었다.”

이후 동네의 사실적 초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곳을 둘러싼 개발과 보존의 오랜 대립을 걷어내고, 삶의 근거로 바라봤다. 날씨나 계절에 따라 동네는 달라졌다. 지난해 구정, 아침 일찍 눈이 내렸다. 세운상가 2층에서 예지동 시계 골목을 바라봤다. “아, 여기가 소거됐구나…. 이 건물이 눈을 맞는 건 마지막이겠구나.” 벗겨진 흙 위에 최후의 랜드마크처럼 선 6층 규모의 분홍 건물을 ‘모습’(2022)으로 남겼다. 사라졌으나 그림으로 남아있다. “어디에 어느 건물이 있었는지 지도처럼 선명하다. 빈 공간을 기억이 채운다.”

서울 삼청동 초이앤초이 갤러리, 25일까지.

◇길의 주름, 계단이 되다

김재경 1999년작 사진 ‘Mute-27-옥수동’(38×25㎝). /서울대학교미술관

건축사진가 김재경(65)씨는 20여 년 전부터 후미진 서울의 계단을 촬영해왔다. “산이 많다 보니 서울은 수직의 구조가 많다. 오르내리는 삶의 장면이 많다. 잘 살아보기 위해, 성취하기 위해 디뎠던 고단한 발걸음이 많다. 나는 계단이 그 희망의 메타포처럼 느껴진다.”

1999년 옥수동에서 촬영한 계단처럼, 계단은 생활의 여러 갈래를 드러낸다. 높낮이 다른 들쑥날쑥한 직각의 콘크리트 요철이 좌우에서 각자의 길을 형성하다 이윽고 위에서 만나 하나의 계단이 된다. “하나는 내 계단, 하나는 네 계단. 아마 건조 시기가 달라 이런 형태일 것인데, 결국 합쳐진다.” 계단에도 조형미가 있다. 1999년 하월곡동에서 마주한 주택가 계단은 마치 미국 설치미술가 도널드 저드의 서랍 형태 작품처럼 보인다.

계단 사진 연작 ‘Mute’는 세기말 시작됐다. “21세기에 대한 핑크빛 전망이 쏟아지던 시기였다. 어느 날 금호터널을 지나다 건물이 헐리는 장면을 봤다. 새집을 짓는 건 희망찬 일이지만, 헌 집은 어떻게 되는가….” 기록하기 위해 2~3개월 동안 황급히 서울을 누볐다. “보통 건축 사진은 세련된 건축 디자인을 위한 것이다. 나는 삶 속에서 형성된 디자인을 찍고 싶었다. 늙으면 누구나 주름살이 생긴다. 그것도 그대로 아름답지 않나.”

서울대학교미술관에서 3월 5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