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성이 화장실에 놓인 비누 조각 ‘화장실 프로젝트’를 만지고 있다. 프랑스 마리 앙투아네트의 얼굴은 머지않아 뭉개질 것이다. /박상훈 기자

화장실부터 전시장이다. 세면대에 조각상이 놓여 있다. 서양 대리석 조각인가 헷갈리지만, 얼마든지 만져도 된다. 비누니까.

“씻어 보세요.” 비누 작가 신미경(56)씨의 ‘화장실 프로젝트’가 올해 20주년을 맞았다. 실제 화장실에 비누 조각을 설치해 누구나 사용할 수 있게 한 뒤, 닳아 형태가 뭉개진 조각상을 수거해 전시하는 미술 실험이다. 마모를 통한 시간성,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도다. 동시에 사회의 도덕성까지 측정한다. 전 세계에서 지금까지 도난 사고가 발생한 도시는 두 곳이다. 중국의 상하이, 한국의 광주. “조금 더 크게 만들 걸 그랬다”며 신씨는 웃었다.

작가 몸을 본떠 비누로 제작한 ‘번역-안토니오 카노바의 비너스 조각상’(2002). /박상훈 기자

서울 코리아나미술관 개관 20주년 전시에서도 ‘화장실 프로젝트’는 가동되고 있다. 남녀 화장실 네 곳뿐 아니라, 6층 전시장에는 지난해 잠실 백화점 화장실에 설치됐던 비누 조각 6점이 쇼케이스 안에서 존재의 유한성을 증명하고 있다. 땟국물이 눈물처럼 굳어있는 조각의 경우, 손을 갖다 댄 사람의 당시 청결 상태까지 가늠할 수 있다. 고로 조각은 공공연히 드러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흔적인 셈이다. 그 취약한 흔적을 동상으로 제작해 영원성을 부여한 ‘풍화 프로젝트: 브론즈’도 함께 놓여 있다. 이번 개인전은 6월 10일까지 열린다.

화장품 회사(코리아나)가 세운 미술관, 민낯을 은유하는 비누와의 만남은 그래서 흥미롭다. 작가는 “비누 작품은 미술관에서 비롯했다”고 말했다. 영국 유학 당시 대영박물관에서 마주한 매끈한 옛 대리석 조각이 비누처럼 보였던 것이다. “나와 별로 관련 없는 소재가 가장 일상적인 재료로 보이는 동시대성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 다른 맥락과 시선을 던지자 조각은 새 얼굴을 드러냈다. 비누 조각 ‘번역-그리스 조각상’(1998)을 시작으로 온갖 변주가 진행 중이다.

비누 200㎏ 정도를 섞어 굳혀 추상화처럼 제작한 'Large painting' 연작을 한 여성이 바라보고 있다. 그림에서 향이 진동한다. /박상훈 기자

비누를 200㎏ 가까이 녹이고 큰 틀에 부은 뒤 굳힌 ‘Large painting’ 연작도 선보인다. 서로 다른 색의 비누와 향이 섞이면서 완성된 추상화다. 토치(torch)로 표면을 녹여 때수건 등으로 연마한 노동 집약의 결과가 얼핏 프랑스 화가 모네의 ‘수련’처럼 보이기도 한다. 신씨는 올해 말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에서 열리는 첫 번째 대규모 한국 현대미술전에도 초청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