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접해라…나가면 작업할게 너무 많다.”
'단색화 거장' 박서보(본명 박재홍)화백이 14일 오전 9시34분에 별세했다. 향년 92세.
박 화백은 지난 2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았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캔버스에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며왕성한 활동을 해왔다.
14일 박 화백의 며느리인 김영림 기지재단 이사에 따르면 박 화백은 지난 목요일(12일) 몸이 허약해져서 은평구 성모병원에 입원중이었다. 저녁 6시30분 정도에 의식을 잃었고 몇차례 심폐소생술을 했다. 병원에서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김 이사는 병원에서도 박 화백이 "작업할게 많다'며 배접하라고 한 당부가 마지막 말씀이 되었다"며 "어머니와 함께 "배접해놓은 게 많은데, 또 그런다. 그림 욕심 많아서 빨리 퇴원하셔야겠다"고 했는데 라며 슬픔을 전했다.
박 화백은 지난 3월 제주 서귀포시 JW메리어트 호텔에서 열린 '박서보 미술관' 기공식에 참석, 건강한 모습을 보였다.
경북 예천 등 박서보 미술관 건립이 무산된 이후 제주에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 건립에 "굉장히 감격스럽고 영광스럽다"며 "작품이 하나되는 경험을 상상하니 창작에 더욱 집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밝힌 바 있다. 박서보 미술관은 2024년 7월 완공 예정으로 박 화백은 "이곳을 찾는 모든 이가 제주의 자연과 함께 예술과 호흡하며 스스로를 치유하는 시간으로 보낼 수 있었으면 한다"고 바랐다.
박 화백은 생전 '그림은 수신과 치유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폐암 2기 판정을 받고 '아무래도 살기 위해 다시 작업을 해야만 한다'며 다시 작업실에 칩거했다.
박 화백의 딸은 "그의 머릿속은 하루 종일 작업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 있으며, 창조 욕구로 밤잠을 설치기도 한다"며 "팔의 힘을 기르기 위해 캔버스를 직접 만들고 망치질을 한다. 집게로 캔버스 천을 잡아당긴 날이면 손은 어김없이 떨려서 들고 있는 수저로 저녁 테이블을 두드리는 드러머가 된다. 사실 아무도 그가 작품을 끝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연필을 깎는 그의 떨리는 손에는 무기를 닦으며 전쟁터로 나갈 준비를 하는 노장의 비장함이 서려 있다"고 아버지 박서보에 대해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라고 평하기도 했다.
"지구에 살아있는 시간이 많지 않거든요."
2년전인 2021년 고인은 뉴시스와 인터뷰에서 "죽어서 무덤에 들어가서 후회하지 않으려고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열정을 불태웠다.
고인은 이중섭·박수근·김환기 등 '죽은 화가'와 달리 살아 생전 화가의 기쁨을 누린 화가다. '단색화 거장'으로 불리며 지난 10여 년 전 팔순에 최고의 화가로 등극하며 승승장구 했다. 화가는 환갑 이후부터가 절정이라는 말을 박서보 화백이 증명했다.
일본 유학파 등 이전 세대와 달리 '토종 미술인'인 그의 그림 '묘법'은 마법이 됐다 '장르가 박서보'라 할 정도로 독보적인 작품이다. "한국에서 대학을 나오고 끝까지 살아남아 단색화를 일궈내고 세계화시켰다."
박서보 화백은 1950년대 문화적 불모지였던 한국미술에 추상미술을 소개했다. 1957년 한국 엥포르멜 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현대미술가협회의 주요 멤버로 활동한 뒤, 1961년 세계청년화가 파리대회에 참가하여 추상표현주의 미학을 바탕으로 한 ‘원형질’ 시리즈를 전개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유전질’, ‘허상’ 연작을 발표하며 보다 발전된 추상표현주의를 선보인 데 이어 1970년대 이후 ‘묘법’을 통해 새로운 전환을 시도했다.
일명 '손의 여행'으로 일컫는 그의 대표 작품 '묘법(描法·Ecriture)은 박 화백의 회화 인생의 정점을 이룬다는 평과 함께 국제적인 명성을 쌓았다. ''장르가 박서보'라 할 정도로 독보적인 단색화 작품으로 국내외에서 호평 받았다.
수행하듯 반복해서 선을 긋는 '묘법은 종이 대신 한지를 사용한 화면 안에 반복적인 선 긋는 행위를 통해 고도의 절제된 세계를 표현한다. '묘법'은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로 부상, 세계 미술계의 러브콜을 받았다. 1976년 작 ‘묘법 No. 37-75-76′이 2018년 홍콩 소더비 경매에서 200만달러(약 25억원)에 팔렸다.
지난 6월 미국 뉴욕타임스는 ‘한국 미술계의 거장, 자신의 유산을 세상에 남기려 하다(A Towering Figure in South Korean Art Plans His legacy)’라는 기사를 통해 박서보의 인생과 예술철학, 작품세계를 집중적으로 다룬 바 있다.
"나는 그림 그리기가 수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색칠과 선 긋기를 반복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만들어내는 깊은 맛은 서양인들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에요. 누구도 따라못할 밀도감을 담으려고 지금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생전 박 화백 인터뷰중)
고인은 홍익대 미대 서양화과 출신으로 홍익대 교수, 학장, 한국미협 이사장을 역임한 교육자이자 행정가로 한국 추상미술을 개척하고 이끌어왔다.
1931년 경북 예천에서 출생,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했다. 1956년 김영환, 김충선, 문우식과 함께 '4인전'을 통해 반국전 선언을 발표, 앵포르멜 기수로 화단의 스타작가였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1962-1997) 및 학장(1986-1990)을 역임했다. 2000년에는 명예교수로 임명되었으며 한국미술협회 이사장(1977-1980) 및 고문(1980)으로 활동했다. 1984년 국민훈장 석류장, 1994년 옥관 문화훈장, 2011년 은관 문화훈장, 2021년 금관 문화훈장을 수훈했다.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도쿄도 현대미술관, 파리 퐁피두 센터, 구겐하임 아부다비, 홍콩 M+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60여년 간 이어온 단색화 그림에 자부심이 강했다. NFT 열풍속에도 고인은 "내 그림 자체가 대체불가능한 것"이라며 "누구도 내 작품 이미지를 NFT(Non fungible Token·대체불가능토큰)라는 이름의 상업적인 용도로 사용할 수는 없다. 내 작품이 디지털의 형식으로 상업적으로 거래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난해 자신의 이름을 딴 '광주비엔날레 박서보 예술상'을 제정, 10만 달러를 지원했지만 지난 5월 예술인들의 반발로 첫번째 수상자만 내고 폐지돼 안타까움을 전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에 마련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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