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약수동 화실은 어머니(김기순)가 지어주셨어요. 1960년대 적산 가옥에 살았는데 겨울에 추웠어요. 휘발유값이 비싸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 집 안방 앞으로 가늘고 긴 좁은 마루에서 소품을 그렸지요. 대작을 그리던 아버지가 소품을 그리니까 소품 작품값은 싸겠거니 했는데, 아버지는 ‘가격을 그렇게 매기는 것은 아니’라면서 아예 안 팔고 보관해온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처음으로 보이게 됐어요.”(유자야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이사)
'한국 1세대 추상화가' 故유영국(1916~2002) 사후 최초로 미공개 소품을 한자리에서 처음 공개하는 전시가 서울 삼청동 PKM갤러리에서 열린다. 1950년대∼1980년대 유화 34점 중 21점으로 유족들이 한 번도 공개하지 않고 소장했던 작품이다.
"늘 그림만 그렸던 아버지"로 기억하며 유자아 이사는 "대작을 하셨던 아버지가 소품을 그리게 된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아버지 시대 작가들은 소품을 많이 했었지요. 그때 분들은 아버지 대작을 보고 '큰 그림이 다 좋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며 '소품에서 밀도를 높일 수 있다고 했는데, 아버지는 자신은 큰 그림도 작은 그림도 잘 그린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안 팔린 것이 아니라 안 판 소품들은 이제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유영국 대작이 10~15억 원 선을 호가하는 만큼 소품의 작품값은 만만치 않다. 작다고 '싸겠거니'하는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틀렸다. PKM갤러리에 따르면 24.5x33.3cm 크기 작품값은 1억 선을 넘는다.
소품이라고 허투루 그린 작품은 하나도 없다. 밀도감과 아우라로 대작 못지 않은 색감과 에너지를 뿜어낸다. 산을 모티브로 자연을 선과 면, 색채의 조합으로 그린 유영국의 특징이 그대로 녹아있다.
유영국 장남 유진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은 "어린 시절 아버지는 말이 없으셔서 뭘 그리는지, 설명도 안 하니 몰랐는데, 최근 로맹롤랑이 쓴 '베토벤 일생'에서 '오션 인 필링'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때 아버지 그림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공학도로 살던 유 이사장은 "'오션 인 필링'이라는 말은 대양과 산, 하늘이 붙어있는 무한히 큰 영원이 계속될 것 같은, 대자연과 혼연일체라는 뜻인데, 아버지의 그림도 산과 산맥이 이어진 우주 같은 느낌을 받는다"면서 "내년에 미국 페이스에서도 전시도 있고 꾸준히 아버지와 작품을 많이 알릴 것"이라고 밝혔다.
이중섭의 친구이자 일본 문화학원 동기인 유영국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아 옹고집스럽게 한국적 추상세계를 구축했다. 화업을 통한 절대자유를 추구했던 유영국은 한국 최초의 추상화가이자 김환기 화백과 쌍벽을 이루는 한국 근현대 미술의 선구적 작가로 평가 받는다.
2002년 87세에 타계 후 '내 작품은 어차피 죽어야지 사람들이 산다'는 그의 말처럼 유영국 시대가 열렸다.
2016년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회고전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과 부산시립미술관에서 공동으로 열렸고, 2023년 미국 뉴욕 페이스갤러리에서 유영국의 해외 첫 개인전이 열렸다. 올해는 유럽 첫 개인전이 진행 중이다. 세계 최대의 현대미술축제인 '2024 베니스비엔날레'에 맞춰 주최측의 공식 승인을 받은 병행 전시로, 베니스비엔날레에서 꼭 봐야 할 최고의 전시로 꼽혔다. 베니스의 유서 깊은 고택 퀘리니 스탐팔리아 재단에서 11월24일까지 열린다.
'유영국의 자연: 내면의 시선으로'를 타이틀로 10월10일까지 여는 전시하는 PKM갤러리 박경미 대표는 "작가는 이미 세상에 안 계시지만 생전에 추구하셨던 '인생은 짧고 예술은 영원하다'는 가치를 일깨우시는 최고의 표본"이라며 "내면과 품위로 발현된 유영국의 중용의 미학을 제대로 조명하겠다"는 목표다.
PKM갤러리는 9월4일 개막하는' 프리즈 서울' 아트페어에 유영국의 1973년도 100호 크기 작품을 소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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