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스 페그 지음|이경준·김두완·곽승찬 옮김|그책

더 컴플리트 데이비드 보위

니콜라스 페그 지음|이경준·김두완·곽승찬 옮김|그책|948쪽|4만4000원

평상시 모습과는 달리 방송 예능 프로그램에서 새로운 개성이나 이미지를 선보일 때 흔히 ‘부캐릭터(부캐)’라고 부른다. 본래 컴퓨터 게임에서 유래한 말이다. 하지만 트로트를 부르는 ‘유산슬’처럼 유재석이 도전하는 역할들이 인기를 끌면서 어느덧 ‘부캐’는 일상적인 용어가 됐다. 그렇다면 이런 연예인들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팝 음악사상 최고의 ‘부캐’는 과연 무엇일까.

영국 록 가수 데이비드 보위(1947~2016)가 1972년 음반을 통해서 선보인 ‘지기 스타더스트(Ziggy Stardust)’가 최고의 후보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그럴 만했다. 보위가 보여준 ‘지기 스타더스트’는 지구인이 아니라 아예 외계인이었으니까. ‘지기’는 몰락 위기의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 지상으로 내려온 가공의 양성애(兩性愛) 록스타로 설정됐다. 빨간 머리와 짙은 화장, 우주복을 연상시키는 복장부터 당장 범상치 않았다. 우리는 외계인이 들려주는 로큰롤을 듣는 셈이었다.

2013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노래 8위 데이비드 보위

900쪽을 훌쩍 넘는 보위에 대한 백과사전인 이 책에서는 역사적 의미를 이렇게 명쾌하게 정리했다. “퀸과 키스 같은 밴드의 등장을 통해서 하드 록의 미래를 만드는 데 일조했고, 조지 클린턴 같은 흑인 음악가들의 우주적 화려함을 거쳐서 프린스와 마돈나 같은 1980년대 거물의 양성적 디스코 스타일로 활로를 열었다.” 다시 말해서 보위가 없었다면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와 마돈나·프린스의 팝 음악도 지금과는 달랐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영국의 배우이자 작가, 감독인 저자가 보위의 음반과 노래, 공연과 영상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이 책은 한 명의 팬이 가수에 대해 보여줄 수 있는 애정의 극한을 담아 놓은 ‘증거물’과도 같다. 보위의 문화사적 의미는 부캐릭터 창조에만 그치지 않았다. 이전까지 로큰롤은 거칠고 공격적인 남성 중심적 장르라는 악명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보위는 화려하고 반짝거리는 화장과 의상으로 남성성과 여성성의 경계를 과감하게 허물었다. 관능미와 퇴폐미, 섹시함이 한데 어우러진 ‘글램 록(Glam Rock)’의 탄생이었다. 보위는 탐미적이고 유미주의적(唯美主義的)인 록 음악도 가능하다는 걸 보여줬다는 점에서 오스카 와일드의 후예였다. 그가 당대의 패션 아이콘이자 성 소수자의 상징으로 부상한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그의 무대는 단순한 가창력 뽐내기가 아니라 록 음악과 뮤지컬, 패션 쇼와 연극이 한데 어우러진 종합 예술이었다. 일본 정상급 디자이너 야마모토 간사이(1944~2020)가 보위의 의상 담당이었다. 현대음악 미니멀리즘 작곡가 필립 글래스는 보위의 음악에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교향곡을 작곡했다. “보위는 로큰롤을 연주했던 매 순간마다 연극적인 문맥 안에서 배우로 연기했다”고 저자는 평했다.

성별을 분간하기 힘들 만큼 새빨간 머리와 화려한 의상의 남성 록스타 데이비드 보위. 로큰롤이 그저 거칠고 우락부락한 음악이 아니라 얼마든지 세련되고 탐미적인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걸 입증했다. /페이스북

하지만 그의 초반 경력은 화려한 성공가도(成功街道)보다는 실수투성이이자 실패의 연속에 가까웠다. 미국에서 선금(先金) 3만달러의 호조건을 제안받았지만, 정작 그 사실을 모르던 런던의 매니저는 영국에서 단돈 500파운드에 계약하고 말았다. 초기 음반들은 인기 차트 진입에 실패했고 영국에서는 수천 장 판매에 그쳤다. 훗날 통산 음반 판매량이 1억장에 이르렀다는 점을 감안하면, 믿기 힘들 만큼 초라한 성적이다. 하지만 보위에게 악조건은 오히려 쓴 약이 됐다. 처음부터 성공했다면 보위는 “확신하지만 영국 웨스트엔드의 뮤지컬 무대에서 그냥 적당한 역할을 맡는 노련한 배우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이 낳은 세계적 명가수 데이비드 보위가 암 투병 끝에 2016년 1월 10일(현지 시각) 별세했다. 향년 69세. 본명이 데이비드 로버트 존스인 보위는 1970년대 '글램 록'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창시자로 명성을 떨쳤으며, 20세기 가장 성공적인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벽돌에 가까운 책의 두께 때문에 처음부터 독파하기는 쉽지 않다. 이럴 때는 관심 분야에 따라서 해당 챕터를 펼치는 것도 효과적 독서법이다. 팝과 록 마니아들은 당연히 음반과 노래에 대한 장부터 읽으면 된다. 영화광들은 보위의 출연작을 정리한 대목을 펼치면 좋다. 보위는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였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는 예수를 핍박하는 빌라도 총독 역이었고, ‘바스키아’에서는 화가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했던 앤디 워홀 역을 맡았다.

미술 애호가라면 보위의 전시회와 수집 작품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후반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보위는 1970년대부터 그림을 그렸고 1990년대에는 전시회를 열었던 화가였다. 또한 루벤스와 뒤샹, 허스트의 작품을 소장했던 수집가이기도 했다. 어떤 장을 펼치든 보위가 20세기 문화계 전반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던 예술적 기인(奇人)이자 거인(巨人)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