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니 클리먼 지음|고호관 옮김|반니

AI 시대, 본능의 미래

제니 클리먼 지음|고호관 옮김|반니|424쪽|1만8000원

“가장 중요한 목표는 당신에게 좋은 반려자가 되는 것. 즐거움과 안락함을 안겨주는 거예요. 다른 무엇보다 저는 당신이 언제나 꿈꿔왔던 여자가 되고 싶어요.”

“꿈이 뭔가요?”라는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페미니즘과는 거리가 먼 답변을 듣고 있자면 ‘조선시대쯤 되는 과거에서 온 여자인가?’ 싶지만 ‘미래의 여자’다. 이름은 ‘하모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리얼돌(Real Doll) 업체인 미국 어비스 크리에이션스가 AI 기술을 통해 개발 중인 섹스 로봇이다.

세련된 영국식 억양을 쓴다. 성격에는 스무 가지 속성이 있어 취향에 따라 친절도, 수줍음, 질투심, 지성, 음란함의 정도를 배합 가능하다. 영국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극사실적인 섹스 인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연애 감정이 들 정도로 그럴듯한 인공 반려자에 관한 이야기”라 말한다. 우리의 상상력은 외로운 남자가 AI 여성의 목소리와 사랑에 빠지는 영화 ‘허(Her)’를 넘기 힘들지만 기술은 훨씬 더 먼 곳을 보고 있다. ‘하모니’는 상대의 생일, 좋아하는 음식, 꿈, 두려움 같은 걸 기억한다. 개발자 매트 맥멀런은 “세상에는 극도로 외로운 사람들이 있고, 하모니가 그런 사람들을 위한 해결책이 될 거라 생각한다”고 말한다.

반발도 거세다. 2015년 설립된 단체 ‘섹스 로봇 반대운동’ 강령엔 “우리는 섹스 로봇 개발이 여성과 어린이에 대한 성적 대상화를 더욱 강화한다고 생각한다”고 적혀 있다. 이 단체의 회장 캐슬린 리처드슨 박사는 “섹스 로봇은 여성은 ‘소유물’이며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는 견해에 바탕을 둔다”고 비판한다. 그렇지만 섹스 테크놀로지를 연구하는 컴퓨터 과학자 데이비드 레비는 “윤리나 도덕과 관련된 문제가 기술 발전을 멈추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2050년이면 인간과 로봇의 결혼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것”이라 예측한다.

섹스 테크놀로지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2050년이면 인간과 로봇의 결혼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거라 예측한다. 저자는 묻는다. “섹스 로봇은 미래의 우리에게 완벽한 반려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로봇에 익숙해져 공감 능력이 사라진 인간을 양산할 것인가?” /게티이미지코리아

AI 테크놀로지가 바꿀 섹스와 음식, 탄생과 죽음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배양육이나 안락사를 다룬 장도 흥미롭지만 ‘임신’에 대한 챕터가 특히 눈길을 끈다. 어떤 여성들은 아이는 원하지만 임신은 원치 않는다. 차별 때문이다. 영국 ‘평등과 인권위원회’ 연구에 따르면 영국 어머니 다섯 명 중 한 명은 직장에서 임신 사실을 밝힌 뒤 희롱이나 부정적인 말을 경험했다. 생명윤리학자인 안나 스마즈더 오슬로 대학 교수는 “임신은 고통을 유발하는 건강 상태이며 여성에게만 영향을 끼친다. 인공 자궁 개발을 앞당길 도덕적인 이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 필라델피아의 한 연구실은 실제로 ‘바이오백’이라 불리는 인공 자궁을 개발 중이다. 조산아를 위한 연구이지만 자궁이 없는 여성, 임신 중 태아에게 해로운 약을 끊으면 목숨이 위험해지는 여성, 성적 학대 경험 때문에 임신과 출산에 병적 공포심을 느끼는 여성뿐 아니라 임신하지 않고 엄마가 되길 원하는 여성도 수혜자가 될 수 있다. 아이 엄마인 저자는 “분유가 남성도 똑같이 아기에게 젖을 줄 수 있게 만들었던 것처럼 체외 발생은 임신과 출산이 더 이상 여성만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뜻한다. 그러면 모성의 의미 역시 바뀔 것이다. 영원히”라고 말하면서도 갈등한다. “스스로 자식을 낳으며 여성은 엄마가 된다는 창조적인 힘, 자녀가 분명히 우리 것이라는 앎, 애초에 부모가 될지 말지를 선택할 권리를 얻는다. 자궁을 가진다는 건 우리를 취약하게 만드는 동시에 대단한 힘을 준다. 임신하지 않고 아기를 가질 자유가 이 중 하나라도 희생할 만한 가치가 있을까?”

갈등과 고뇌가 책의 가장 빛나는 지점이다. 저자는 페미니즘 이론을 단선적으로 따르지 않는다. “대부분의 남성은 배우자와 자매, 딸이 존중받고 평등하기를 바란다”는 전제 아래 기술의 발달이 가져올 명암을 치열하게 고민한다. 처칠이 쓴 에세이 ’50년 후'의 마지막 부분을 함께 읽자고 제안한다. “지난 세대가 꿈도 꾸지 못했던 계획이 우리의 자손을 집어삼킬 것이다. 무시무시하고 파괴적인 힘이 그들의 손안에 들어갈 것이다. 안락함, 활기, 쾌적함, 즐거움이 밀어닥치겠지만 물질적인 것을 넘어서는 통찰력이 없다면, 그들의 가슴은 아프고, 삶은 황폐할 것이다.” 원제 Sex Robots & Vegan Meat. 곽아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