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페이건·나디아 더러니 지음|안희정 옮김|올댓북스

침대 위의 세계사

브라이언 페이건·나디아 더러니 지음|안희정 옮김|올댓북스|344쪽|1만8000원

수명이 90년이라면 30년 동안 뭘 하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잠을 잔다. 그 행동을 하는 장소는 침대다. 한국인도 요람부터 병상까지 침대 생활을 한다. 하지만 누군가 “네 인생을 내가 떠받쳤다”고 주장할 때 이 가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지분(33%)을 인정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침대는 말이 없다. 절대 토라지지 않는 애인처럼 받아줄 뿐이다. 인류학자와 고고학자가 함께 쓴 이 책은 침대를 역사의 증언대에 세운다. 골격은 수천 년에 걸친 ‘침대의 진화(evolution)’. 흥미로운 기록과 이야기를 거죽으로 삼았다.

프랑스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가 침대에서 독배를 마시는 소크라테스와 슬퍼하는 제자들을 그린 '소크라테스의 죽음'(1787). 과거에 침대는 이렇게 공적인 공간이었다. /위키피디아

◇최초의 침대는 땅을 파낸 구덩이

섹스, 탄생, 식사, 통치, 반란 모의, 두려움, 꿈, 사생활, 죽음···. 삶은 침대에서 시작돼 침대에서 끝난다. 거의 모든 침대의 역사를 담겠다는 의욕으로 이 책은 출발한다.

우리를 점심밥쯤으로 여기는 동물들이 바글거리던 아프리카에서 선조들은 나무 위에 무리 지어 잠을 잤다. 약 200만년 전 불을 길들이게 되자 야영지로 내려왔고 바위 아래, 동굴 속으로 취침 공간을 넓혀갔다. 최초의 침대는 땅을 파낸 구덩이였다. 영어 bed(침대)는 원시 게르만어로 ‘땅바닥을 파내 만든 쉼터’를 뜻한다.

문명이 발생하자 침대 높이는 점점 올라갔다. 투탕카멘이 이집트를 통치하던 기원전 14세기 중반엔 우리가 알아볼 만한 꼴을 갖췄다. 그 직사각형은 지난 5000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 다리 달린 침대는 사회적 신분의 징표였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바닥에 가까이 잤다.

침대는 야릇한 행위들을 수없이 목격했다. 고대 이집트 무덤 벽화를 보면 성행위의 목적은 후계자 잉태였다. 왕실 침대에서 파라오는 과업(?)에 충실해야 했다. 중국에선 황제의 성생활이 일정표에 따라 엄격히 관리됐다. 17세기 영국에서 침대는 결혼을 법적으로 정의하기 시작했다. 남편이나 아내가 불륜을 저지르면 ‘침대가 더럽혀졌다’고 말했고, 피해자는 ‘그들을 침대 밖으로 쫓아낼’ 수 있었다.

기원전 14세기 투탕카멘의 3단 접이식 침대. /올댓북스

◇'테스 형'이 들려준 마지막 말

많은 문화권에서 임종 침대 앞에는 가족과 친구, 그 밖의 사람들이 대규모로 모였다. 가문의 수장이 지위를 넘겨주는 자리라 관중이 필요했다. 즉 ‘공적인 죽음’이었다. 죽음은 도처에 있었고 언제나 삶의 일부였다.

서양인들은 마지막 말에 관심을 가졌다.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가장 유명하다. 불경죄와 아테네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죄로 고발된 그는 독약 형을 선고받았다. 제자 플라톤이 남긴 기록이다. 독이 퍼지는 마지막 순간, 소크라테스는 얼굴을 덮고 있던 시트를 내리고 친구에게 말했다. “크리톤, 내가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수탉 한 마리를 빚졌는데 자네가 대신 갚아줄 수 있겠는가?”

침대는 또 정치 무대였다. 윈스턴 처칠은 2차 세계대전 때 방공호가 아니라 침대에서 영국군을 지휘했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처칠의 침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침대에는 서류와 공문이 어질러져 있었고 비서와 속기사를 호출하는 벨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렸다. 하지만 처칠은 탁월한 지도자였다. 침대에서 회의를 주재하는 바람에 중요한 공무를 망쳤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사생활의 역사는 짧다

서양에서 보통 사람이 침실을 벽으로 막고 개인적인 공간을 확보하게 된 역사는 짧다. 산업혁명 이후의 일이다. 갈수록 밀집되는 도시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둘로 분리하기 시작했다. ‘일터에서의 나’와 ‘집에서의 나’다. 침실은 점점 사적인 공간, ‘피난처’로 변해갔다. 도널드 트럼프와 멜라니아 트럼프처럼 부부가 각방을 쓰거나 다른 침대를 사용하기도 한다.

한국은 ‘잠 부족 국가’다. 마약 베개, 기절 베개, 요술 베개가 출시될 정도다. 도시 인구가 급증하고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자 접어서 벽 따위에 넣는 침대가 다시 등장했다. 오늘날의 침대는 USB 포트와 스마트 기기들이 갖춰져 멀티태스킹이 가능하고 사용자를 바깥세상과 연결해준다. 거꾸로 말하면 침대의 사생활이 무너지고 있다.

이 교양서는 투탕카멘의 3단 접이식 침대부터 나폴레옹이 사랑한 야전침대, 꽃이 만발하고 냉난방을 제공하는 미래의 매트리스까지 흥미진진하다. 역사의 빈 구멍을 채우는 스토리텔링이 매끄럽다. 초반부엔 책장이 바삐 넘어간다. 하지만 늘어놓기만 해 넓되 깊지는 않다. 상당수 책이 그렇듯 부분이 전체보다 낫다. 침대에서 읽기를 추천한다. 원제 ‘What We Did in Bed’.

영국 작가 트레이시 에민의 작품 '나의 침대'(1999). 실연 후 생리혈로 얼룩진 속옷, 빈 술병, 콘돔 등이 어지럽게 널린 자기 침대를 전시장에 그대로 옮겨놓았다. /올댓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