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세계의 인물은 빌 게이츠였다. 그가 쓴 책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 출간에 맞춰 뉴욕타임스, CNN, BBC 등 전 세계 주요 언론이 그를 인터뷰했다. 책은 아마존 베스트셀러 4위에 올랐다. 그는 동시에 파워 독서가이자 출판계 ‘인플루언서'. 2010년부터 블로그 ‘게이츠 노츠’를 통해 책 130여권을 추천해왔는데 이 리스트는 전 세계 독서시장에 큰 영향을 끼친다. 그렇다면 게이츠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책은 무엇일까.
◇'최애' 작가는 에너지 전문가
기후변화 방어의 최전선으로 게이츠를 이끈 결정적 요인은 선진국과 저개발국 국민의 ‘에너지 빈부 격차’를 해결하고 싶다는 욕망. 이는 게이츠가 가장 ‘애정하는’ 사상가로 꼽는 바츨라프 스밀(78)이 저서를 통해 반복하는 주장이다. 체코 출신으로 현재 캐나다 매니토바대 명예교수로 있는 스밀은 에너지를 핵심 동인(動因)으로 인류 문명사를 정리하고, 우리가 앞으로 무슨 에너지를 어떤 방식으로 써야 할지 논의하는 거시적 관점의 책을 내고 있다. 게이츠는 블로그에 “남들이 영화 ‘스타워즈’ 신작을 기다리는 만큼 나는 바츨라프 스밀 책을 기다린다. 2019년 나온 최신작 ‘Growth’(성장·국내 미출간)를 포함해 그의 책 39권을 모두 읽었다”고 적었다.
국내에는 ‘새로운 지구를 위한 에너지 디자인’(창비), ‘에너지란 무엇인가’(삼천리) 두 권이 번역 출간됐다. 스밀은 이들 책에서 “신형 원전은 미국이 앞장서 개발하지 않으면 보급이 어려울 것”이라며 “지구온난화의 충격에 직면하면 원자력은 상당한 호소력을 가질 것”이라고 했다. 빌 게이츠는 2010년 신형 원자로 개발사 ‘테라파워’를 차리고 저개발국에 이를 보급한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 스밀의 영향이다.
거시적 관점의 책을 선호한다. 유발 하라리가 쓴 ‘사피엔스’ ‘호모데우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을 소개했다. 게이츠는 “‘사피엔스'를 읽고 아내 멀린다와 휴가 내내 인류의 역사를 토론했다”고 썼다. 하라리는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불만스러워하며 무책임한 신들, 이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있을까”라고 질문하며 ‘사피엔스’를 마친다. 게이츠가 기후 재앙을 우려하게 된 것은 하라리로부터 인류의 위험성을 경고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IT 사업가의 외도는 무죄
왜 IT 사업가가 기아 문제 해결과 기후변화에 눈을 돌렸을까. 스포츠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엡스타인이 쓴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열린책들)이 답을 제시한다. 책은 골프 신동이었던 타이거 우즈와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의 성장 배경을 비교하면서 ‘한우물 파기 신화’를 비판한다. 엡스타인은 “전문화 추세로 인해 자기 참호를 더 깊이 파는 데에만 몰두할 뿐, 일어서서 옆 참호를 내다보는 일이 거의 없다”고 썼다. 각자의 영역에서 혁신에 몰두하다가 시스템 전체는 못 볼 수 있다는 지적이다. 페더러는 여러 스포츠를 섭렵한 뒤 테니스 황제가 됐다. 지구를 살리기 위해 나선 빌 게이츠가 감정이입할 만한 내용이다.
◇그도 꿀잠을 원하는 ‘사람’
머리도 좋고, 돈도 많고, 책도 많이 읽는다. 머리숱도 많고 스캔들도 없다. 인간미 없는 만능 초인으로 보이는 그도 단잠을 갈구하는 사람이다. 그는 “내가 꿀잠을 자게 해준 책”이라며 ‘우리는 왜 잠을 자야 할까’(열린책들)를 추천했다.
하버드대 의대 출신 수면 전문가 매슈 워커 UC버클리대 교수가 “잠이 부족하면 창의성, 문제 해결 능력, 기억력, 면역력 등이 떨어진다”며 “미국에서는 수면 부족으로 직원 1명당 연간 2000달러 이상의 생산성 감소가 나타난다”고 한다. 침실 온도를 18.3도로 낮추고, 오후 3시 전 낮잠은 심혈관계에 좋다는 실용적 팁도 준다.
[문학 리스트는 취약… “참신성 없다” 지적도]
지난해 나온 ‘룬샷’은 무명 저자의 첫 책이 빌 게이츠 추천으로 국내에서 히트를 친 대표 성공 사례다. 장보금 흐름출판 팀장은 “빌 게이츠가 ‘내가 가방에 넣어 다니며 읽는 책’이라고 추천했는데, 이에 사람들이 신뢰하고 책을 샀다”고 했다. 이 책은 8만부 이상 나갔다.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 ‘우리는 왜 잠을 자야 할까’는 국내 출간 이후 게이츠가 서평을 올리며 월간 판매량이 3배 늘어났다.
다만 빌 게이츠 추천 도서 목록은 폭과 깊이가 제한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과학·의료·기후변화 관련 책이 많아 일반인 관심과는 동떨어진 부분이 있다. 특히 문학 추천이 드물고 SF 위주다. 게이츠는 ‘마션’ ‘클라우드 아틀라스’ ‘삼체’ 같은 SF 소설을 추천해왔다. 미국 시애틀에 있는 서점 ‘아일랜드 북스’ 관계자는 외신에 “따분해서 깊은 한숨이 절로 나온다. 게이츠의 추천 목록보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목록이 좋다”고 했다. 오바마는 ‘암흑의 핵심’ ‘위대한 개츠비’ 같은 정통 문학과 ‘나를 찾아줘’ 같은 현대 스릴러도 추천하는데 게이츠의 리스트는 다양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한스 로슬링의 ‘팩트풀니스’ 등 이미 화제가 된 책을 추천해서, 참신함이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