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부터 63년을 박서보(90) 화백의 아내로 살아온 윤명숙(82)씨가 에세이집을 펴냈다. 제목은 ‘나로 말할 것 같으면’(알마). 아내와 엄마에서 작가를 향한 홀로서기 시도다. 그는 10일 전화 인터뷰에서 “머릿속에서 옛날 생각을 되풀이할 게 아니라 정리할 겸, 나 스스로 위로할 겸 쓰기 시작한 이야기”라고 했다.

윤씨는 스무 살이던 홍익대 미대 1학년 당시 여덟 살 연상이던 박 화백과 결혼했다. 가난한 화가의 아내로, 삼 남매의 엄마로 살았다. 결혼하며 붓을 놨고, 환갑 때부터 글을 썼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을 들어 보이는 윤명숙씨. /윤명숙씨 제공

그의 정체성은 아내와 엄마였다. 2017년 신문에 에세이를 연재할 당시 “남편 얘기 말고 다른 것을 써보라”는 요청을 받았다. “남편 명성을 우려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남편 얘기 말고는 쓸 것이 없었다.” ‘뇌 구조가 바뀌어야 가능할 일’ 같았다고 한다. 그때 내면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단념하긴 이르다고, 포기하지 말라고 내 안의 내가 소리친다.’

이번 에세이집은 그 내면의 목소리가 낳은 열매다. 평생 부엌을 벗어나지 못한 채, 빨래하고 밥하고 뒤치다꺼리해온 ‘엄마’(남편도 그를 ‘엄마야’라고 부른다고 그는 책에서 고백한다)는 작가 윤명숙으로서 목소리를 낸다.

‘억척스러운 서울 토박이’ 여성이 글에서 드러난다. 주행 시험 12번 만에 운전면허를 땄고, 운전이 젬병인 남편의 운전기사 노릇을 자처했다. 결혼 초기 4년 동안 8번 이사를 하면서도 꿋꿋했다.

때로 글은 박서보의 단색화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을 선사한다. 시대가 파괴한 주변인과의 파란만장 경험을 털어놓으면서도 지나친 감상에 빠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오징어채를 씹다가 6·25전쟁 당시 고초를 겪었던 아버지와 피란 생활 중 땔감을 구하다가 소나무 숲에서 길을 잃었던 스스로의 과거를 떠올린다. 뜨거운 체험이지만, 단정함을 잃지 않는다.

책 제목은 윤씨가 정했다. “아침에 눈을 딱 떴는데 별안간 떠올랐어요. ‘나로 말할 것 같으면’은 자주 쓰는 말버릇인데, 이런 사람이구나 알 수 있는 제목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가 연필로 적은 제목 글씨가 책 표지에 그대로 실렸다.

그는 요즘 집 안 잡동사니를 연필로 소묘한다. 책에도 몇 점을 실었다. ‘버킷 리스트’는 글과 그림을 모아 화집을 내는 것, 그리고 단편소설 쓰기다. 붓을 놓은 지 오래돼 예전과 같지 않다면서도 좌절하지 않았다. “내게 의미 있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고, 그림을 그리는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