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에 책을 치우다가
책장을 넘어 거실 바닥까지 점령한 책을 감당하지 못해 정리에 나섰습니다. 두 번은 읽지 않을 책, 언젠가 읽을 거라 생각했지만 도무지 손이 가지 않는 책 등을 골라 200여 권을 추려 박스에 담았지요.
그냥 눈 딱 감고 테이프로 봉해 버려야 했는데…. 책을 기증받기로 한 곳에서 박스 겉면에 책 수량을 적어달라고 요청한 것이 발단이었죠. 수를 센다는 명목으로 박스를 다시 열어 책을 살폈습니다. 추릴 때만 해도 영영 읽을 일 없을 것 같았던 책들 하나하나가 왜 그렇게 불세출의 걸작처럼 대단해 보이는지요. 다시 꺼내 소장하고픈 욕망과 싸우며 꾹 참고 수를 세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선배가 물려준 ‘김수영 전집’에 이르자 그만 의지가 무너졌습니다. 무심코 펼친 페이지에 하필 이 시가 적혀 있었거든요.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오오 봄이여.”
벚꽃은 이미 끝물이지만 응달진 뜰 한구석, 느린 목련 몇 송이가 초롱처럼 환하게 불 밝히는 밤. 낡아가는 종이 냄새를 맡으며 김수영의 ‘봄밤’을 읽고 있자니 조급하게 정리하고팠던 마음은 그 어딘가로 사라져버렸습니다. 결국 김수영 전집을 비롯한 책 몇 권을 다시 책장으로 되돌려 보냈습니다. “서둘지 말라”고 시인은 노래하네요.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기적 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오오 인생이여.” 곽아람 Books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