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스로의 본질에 다가선 대가로 본질이 원래 붕괴되어있었다는 진단을 받았다.”

지난달 출간된 '젊은 ADHD의 슬픔' 표지. /민음사

지난달 출간된 ‘젊은 ADHD의 슬픔’(민음사)은 회사원 정지음(29)씨의 성인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진단·치료기다. 주의가 산만해 부모에게 ‘지 결혼식에도 늦을 년’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던 필자는 뒤늦게 ADHD 진단을 받는다. ADHD 환자로 살아가면서 어떻게 버텼는지, 어디서 즐거움을 찾는지를 썼다. 지금까지 4000부가량 팔렸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노출되는 것이 금기로 여겨졌던 정신 질환이 출판계에서 ‘내가 겪었으니 할 수 있는 이야기 소재’로 떠오르고 있다. 뒤늦게 ADHD로 진단받은 임상심리학자 신지수씨가 쓴 ‘나는 오늘 나에게 ADHD라는 이름을 주었다’(휴머니스트), 양극성장애(조울증)를 10년 동안 앓아온 삽화가 리단(본명 이한솔)이 쓴 ‘정신병의 에서 왔습니다’(반비) 공황장애를 앓는 회사원이 쓴 ‘지하철이 무섭다고 퇴사할 순 없잖아’(가나출판사) 등이 지난 두 달 사이 쏟아졌다.

과거 정신질환은 정신과 전문의나 심리학자가 제3자의 입장에서 설명하고 조언하는 형식이 많았다. 그러나 이제 ‘아파 봤고, 지금도 아픈 사람의 1인칭 시점’이 힘을 얻고 있는 모양새다. 당사자가 직접 털어놓은 이야기다 보니 공감하며 위로를 얻을 수 있다. 신지수씨는 “누구에게나 결핍은 있으니까. 나에게는 그것이 ADHD라는 이름으로 왔을 뿐이다”라고 적었고, 리단은 “꼭 자신을 긍정하고 사랑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 우리는 기분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던 시기를 지났습니다. 오로지 움직이십시오”라고 썼다.

당사자라 할 수 있는 말도 있다. 리단은 책에서 ‘정신병’(정신질환이라고 한다)이나 ‘정병러’(정신질환자를 자조적으로 이르는 은어) 같은 표현을 거리낌없이 쓴다. 그는 “간단한, 직접적인, 그리고 자조적일지언정 유머러스한 당사자의 말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리단의 책은 출간 한 달 만에 4쇄를 찍으며 현재까지 8000부가 나갔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 김경영 인문 MD는 “겪어 봤기 때문에, 당사자이기 때문에 닿을 수 있는 영역에서 끌어온 직설적이고 실용적인 안내가 빼곡하다”고 했다. 하지현 건국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정신건강학과)는 “독자들이 필자가 직접 경험한 것을 이야기할 때 더 호응하는 분위기로 바뀐 것 같다”며 “정신질환에 대한 문턱과 편견을 낮추는 데 도움을 준다고 본다”고 했다.

왼쪽부터 ‘정신병의 나라에서 왔습니다’‘나는 오늘 나에게 ADHD라는 이름을 주었다’‘지하철이 무섭다고 퇴사할 순 없잖아’ 책 표지. /민음사·반비·휴머니스트·가나출판사

정신질환을 앓는 필자들이 투병기를 쓰는 분위기는 2018년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흔)가 나온 이후 본격화됐다. 기분부전장애(가벼운 우울증)를 앓고 있는 평범한 20대 여성이 쓴 이 책은 국내에서 50만부 이상 팔리면서 일본에도 수출됐다. 한 출판사 대표는 “우울증을 앓고 있는 일반인이 쓴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일반인의 투병 에세이에 독자가 관심을 보인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했다. 우울증으로 시작한 정신 질환에 대한 ‘당사자 서사'는 이제 ADHD, 공황장애 등으로 폭을 넓혀가고 있다.

우리 사회가 정신질환을 대하는 태도가 관대해진 것도 영향을 줬다는 분석도 있다. 코로나가 한창이라 병원 방문이 급감했던 지난해 예외적으로 정신과는 환자가 10% 이상 늘어났다.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이 줄어들고, 마음이 지친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정신과를 찾게 되면서 관련 독자층이 두꺼워졌다는 것이다. 정지음씨와 신지수씨 같은 성인 ADHD 환자는 국내 80만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투병기는 어디까지나 투병기로만 여기고 참고해야 한다. 전문가가 아닌 이가 권하는 치료법 등을 맹신하면 안 된다. 하지현 교수는 “관련 책을 읽고 ‘나도 정신질환에 걸렸나’라는 생각으로 인터넷에 떠도는 검사를 해본 뒤 자기도 정신병에 걸렸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며 “의심이 된다면 전문의의 진단과 진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