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취임선서를 하러 나가기 전 기도를 올리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Credit: Pete Souza/The White House
버락 오바마 전 미국대통령 회고록 '약속의 땅'.

약속의 땅

버락 오바마 지음|노승영 옮김|웅진지식하우스|920쪽|3만3000원

“나는 언제나 이념을 추구하면서 삶을 기꺼이 희생했지만 수많은 사람의 행복을 걸고 그런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었다. (…) 나는 혁명가가 아니라 개혁가였고, 이상까지 그런지는 몰라도 기질적으로는 보수적이었다. 내가 보여준 것이 지혜인지 나약함인지는 다른 사람들이 판단할 것이다.”

900쪽 넘는 이 두툼한 책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통찰은 이 구절이다. 버락 오바마(60) 전 미국 대통령은 2017년 퇴임한 후 집필한 이 회고록에서 리먼 브러더스 사태로 미국 경기가 침체 상황이었던 2009년 취임 직후 상황을 되돌아본다. 오바마 행정부는 파산 직전에 이른 GM과 크라이슬러를 구제하는 등 강력한 부양책으로 경기를 회복했지만 이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의 금융 위기가 미국 경제 전반을 개조해 한 줌의 억만장자가 아니라 노동자 계층의 이익에 봉사하도록 더 공정해질 기회였는데, 오바마가 노골적으로 배신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오바마는 말한다. “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다시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내가 다른 선택을 했을 것 같지는 않다. 추상적으로 보자면 비판자들이 제기하는 온갖 대안과 놓친 기회들은 그럴싸하다. 도덕적으로 흠잡을 데 없으니까. 하지만 세부적으로 파고들면 그들이 제안하는 방안대로 은행을 국유화하고 형법의 규정을 확장하여 은행 경영진을 처벌하고 도덕적 해이를 피하기 위해 금융 시스템 일부가 무너지게 내버려두었다면 사회 질서가 파괴되고 정치적⋅경제적 규범이 왜곡되어 오히려 상황이 더 나빠졌을 게 뻔하다. 언제나 디딜 구석이 있는 부자와 권력자에게 더 나빠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구하려 하는 바로 그 사람들에게 더 나빠졌을 것이다.”

2010년 3월 21일 부담적정보험법(오바마 케어)이 법안 통과에 필요한 표를 확보했을 때, 오바마(맨 앞) 전 대통령이 조 바이든 당시 부통령과 함께 일어나 박수를 치고 있다. 오바마는“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오랫동안 이 법률이 필요했던 모든 미국인을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Pete Souza·The White House

지난해 11월 출간 첫날 90만부, 지금까지 전 세계 582만부 판매된 이 책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대통령 회고록’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단단하고 유려하다. 집필 초기엔 ‘1년 정도 써서 500쪽 안에 다 담을 수 있겠지’ 예상했지만 쓰다 보니 3년의 탈고 과정을 거쳐 두 권 분량이 되었다는 책의 첫 권이다. 앞서 낸 자서전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1995)과 ‘담대한 희망’(2006)에서도 소개한 가족사와 정치 초년병 시절 일화를 축약하고, 2008년 대통령에 당선되어 2011년 5월 오사마 빈 라덴 사살 작전에 성공하기까지 이야기를 담았다.

여전히 컴퓨터보다는 손으로 글을 쓰는 걸 좋아한다는 오바마는 책을 쓴 이유에 대해 “그 모든 권력과 위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직 역시 그저 일자리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상기시켜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목적에 부합하게 책은 ‘위대한 정치인’이 아니라 ‘갈등하는 인간’ 오바마에게 초점을 맞춘다. 정치한다고 가정을 소홀히 하는 자신을 비난하는 아내 미셸을 보며 ‘나는 왜 그녀에게 이런 일을 겪도록 했을까? 나를 버린 아버지에게 아들 자격을 입증하고 외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거창한 기대에 부응하고, 혼혈로 태어난 자신에 대한 불신을 해소하려고 애쓰고 있었던 걸까?’ 되물었던 기억, 빈 라덴 사살 후 하나 되어 환호하는 국민을 보며 ‘이런 단결력, 이런 공동의 목표 의식은 테러리스트를 죽인다는 목표에 대해서만 가능한 것일까?’ 고민에 찬 질문을 거듭했던 일화 같은 것.

‘메르켈은 나의 웅변술 때문에 처음에 나를 경계했다’ ‘사르코지는 감정 표출과 과장된 수사의 화신이었다’ ‘반기문은 정직하고 직설적이었으며 못 말릴 정도로 긍정적이었다’ 같은 세계 지도자들에 대한 인물평도 흥미롭지만 비방과 흑색선전이 난무하는 이 정치의 계절, 무엇보다도 곱씹게 되는 건 정치적 노선이 다른 상대에 대한 포용의 자세다. 당선 직후 처음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를 회상하며 오바마는 적었다. “부시 대통령을 바라보며 그가 대통령 당선자로서 오벌 오피스에 처음 걸어 들어가면서 품었을 모든 희망과 확신을 상상해 보았다. 나 못지않게 이 빛에 눈부셨을 테고, 나 못지않게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겠다는 열망을 품었을 테고, 나 못지않게 역사가 자신의 대통령 임기를 성공적으로 평가하리라고 확신했으리라.” 누군가는 “정치적 수사(修辭)일 뿐”이라 비꼬겠지만, 제스처에 그칠지언정 품위 있고 단정한 ‘정치의 언어’가 참으로 드문 시대 아닌가. 원제 A Promised L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