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도 코로나도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번 주말 전국 낮 최고기온은 36도를 넘나들 전망. ‘수도권 4단계·비수도권 3단계’의 사회적 거리 두기는 22일까지 또다시 연장됐다.
더위를 피해 마음 놓고 떠나기도 어려워진 올여름. 자의 반 타의 반 ‘집콕’으로 이 여름을 나는 독자들을 위해 6명의 전문가가 추천했다. 무더위를 식혀 줄 미스터리·스릴러 걸작 소설 6권.
김선민 괴이학회 운영자, 도진기 변호사 겸 소설가, 박수진 교보문고 북뉴스 에디터, 임지호 미스터리 전문 출판사 엘릭시르 주간, 정명섭 소설가, 조동섭 번역가(가나다순)가 각자 아껴 읽어온 작품을 딱 1편씩만 골랐다.
현실은 답답하지만 상상력엔 제약이 없다. 17세기 미국과 1950년대의 소비에트를 넘나든다. 외계인 모습을 한 아이들, 좀비와 흡혈귀를 합친 듯한 미지의 존재와 만난다. 눈 덮인 숲과 스칸디나비아 반도 최북단의 동토(凍土)를 누빈다. 이 여름, 서늘한 휴식처가 돼 줄 소설들이다.
김선민 괴이학회 운영자
10개월, 종말이 오다|최경빈 외|황금가지
내가 알던 사람이 갑자기 전혀 다른 존재로 변한다면 어떨까. 순식간에 일상이 비일상이 되는 기묘한 공포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해외에서는 이런 장르를 바디 스내처(body snatcher), 즉 신체 강탈자라 부른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미국의 SF 영화 ‘신체 강탈자의 침입(1956)’으로 잭 피니의 소설 ‘신체 강탈자’가 원작이다.
국내에서는 황금가지 출판사에서 해당 장르의 공모전을 지속적으로 진행하며 공포·호러 장르의 저변을 넓혀가고 있다. 이 출판사에서 출간된 ‘10개월, 종말이 오다’는 종말 문학과 신체 강탈자 장르 공모전의 수상 작품집으로, 해당 테마를 다룬 국내의 유수 작품들이 실려 있다.
그 중에서도 김보람 작가의 ‘미래 도둑’은 이런 바디 스내처 소재를 한국적 상황에 맞게 해석한 수작이다. 어느 날 전 세계의 모든 아기들이 외계인의 외모를 갖추고 태어나게 된다. 그들은 곧 탈피를 하며 인간 아기가 되는데, 성별에 따라 엄마나 아빠의 모습을 똑같이 닮아간다. 1년도 되지 않아 부모와 똑같은 외모와 기억을 가지고 완벽하게 그들을 대체하게 된다.
‘미래 도둑’의 주인공은 자살한 아내를 대체하는, 순식간에 아내와 똑같이 성장한 딸을 보며 두려움과 그리움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친숙하지만 이질적인 것. 미지의 존재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공포가 그 안에 담겨 있다. 외계인, 신체 강탈자, 도플갱어, 가족 서사 등 한 작품 안에 다양한 소재가 다채롭게 맞물려서 새로운 방식의 공포를 자아낸다.
귀신이나 살인마가 훅 튀어나와 깜짝 놀라게 하는 기존의 호러에 너무 익숙해졌다면 올여름에는 ‘신체 강탈자’ 장르를 통해 ‘낯선 이질감’이 주는 새로운 공포에 도전해볼 것을 추천하고 싶다.
도진기 변호사·소설가
밤의 새가 말하다|로버트 매캐먼|검은숲
17세기 말 미국 동부 시골 세일럼에서 마녀 사냥의 광풍이 불었다. 원조 유럽을 무색하게 할 만큼 광기에 사로잡힌 이 사건에서 19명이 처형되고 1명이 고문당해 죽었다. 이 모든 것은 대중의 거센 분노 하에, 정의와 재판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하지만 마녀란 건 없으니, 마녀로 지목당해 사형당한 사람은 오판의 희생자가 분명하다.
너새니얼 호손은 세일럼 마녀 재판의 판사였던 조상이 창피해 물려받은 성도 갈아버리고 ‘주홍글씨’를 써 청교도 사회의 위선을 고발했다. 로버트 매캐먼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 것 같다. ‘밤의 새가 말하다’는 17세기 말 미국 동부 마을에서 벌어진 마녀 재판을 그린 미스터리인데, 세일럼의 비극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게 분명하다. 미국인의 가슴 깊이 각인된 부끄러움을 작가는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른 나라의 옛날 재판 이야기를 지금, 우리가, 읽을 이유가 있을까? 분명히 있다. 우선 무지하게 재미있다. 책장이 정신없이 넘어간다. 로버트 매캐먼은 ‘이야기꾼’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고, 그건 허명이 아니다. 문장도 깊고 매끄럽다. 1·2권 도합 12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소설을 들고 한 장을 넘기는 순간 정신은 17세기 미국의 시골로 납치돼 간다. 푹 빠져 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스티븐 킹이 이 책을 혹평한대도 내 평가를 굽히지 않을 생각인데, 스티븐 킹도 ‘모든 것을 잊고 오직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며 극찬했다. 이 책이 의미 없지 않은 이유가 더 있다. 과연 마녀사냥이, 남의 나라의 옛날 이야기일 뿐일까? 문득 이 책 속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싶어진다. “나는 정의로 뭉쳤다는 사람들을 이전에도 많이 봤습니다. 그리고 그건 개도 역겨워할 광경이었어요.” 모든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박수진 교보문고 북뉴스 에디터
차일드44|톰 롭 스미스|노블마인
그것은 연쇄 살인 사건이었다. 어린아이들만을 골라 살해하는 잔혹한 살인마에게 희생된 아이만 44명이었다. 국가와 사회는 왜 이 끔찍한 사건들이 계속해서 벌어지는 것을 막지 못하는가? 어째서 범인을 잡지 못하는가? 그것은 이 사건이 벌어진 곳이 ‘범죄 없는 완벽한 사회’인 1950년대 소비에트이기 때문이다. 빛나는 미래만이 기다리는 이곳에서 살인은 일어날 수 없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전쟁 영웅이자 충실하고 유능한 비밀 경찰인 레오 데미도프는 아내를 스파이 혐의로 고발하라는 잔혹한 충성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고 지역 민병대로 좌천되고 만다. 그곳에서 레오는 소비에트 전역에서 아이들이 연쇄적으로 살해되고 있다는 의심을 갖게 된다. 레오가 쫓는 것은 44명의 아이를 살해한 범인만이 아니다. 범인이 활보하고 다닐 수 있는 사회의 맹점, 감시와 통제가 일상화되었지만 오히려 범죄는 쉽게 은폐되는 사회의 모순이야말로 레오가 맞서야 할 가장 큰 벽이자 위협이다.
레오 데미도프가 등장하는 시리즈는 이후 두 권이 더 출간됐다.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몰입감과 흡인력 때문에 독자는 망설임 없이 소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게 된다.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도록 몰아가는 스릴러로서 완성도도 최상급. 여기에 끝까지 신뢰하고 지지하게 되는 등장인물들의 매력과 마지막 장면이 남기는 먹먹한 여운까지, 이 정도면 동시대 스릴러의 고전이 되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 이 시리즈는 배경이 되는 시대를 놀라울 만큼 생생하게 그려낸다. 논픽션을 읽어서는 잘 와닿지 않을 시대의 공기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고뇌, 절망 같은 것들을 너무나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감동과 재미 그리고 지식까지 담아낼 수 있는, 소설이라는 장르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너무나 훌륭한 대답과 같은 작품이다.
임지호 미스터리 출판사 엘릭시르 주간
시귀|오노 후유미|북홀릭
매년 여름이면 장르소설 추천을 하는데, 올여름은 너무나 무더운 터라 내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빠져들어 읽었던 책이 뭐였나 생각해 봤다. 대개 굉장한 속도감으로 책장이 쭉쭉 넘어가는 서스펜스 스릴러나, 진상이 궁금해 머리를 쥐어짜는 미스터리가 먼저 떠오르는데, 이번에는 끈적한 ‘시귀’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시귀’는 오노 후유미의 공포소설이다. 오노 후유미는 ‘잔예’나 ‘귀담백경’처럼 직구 스타일의 무서운 이야기에도 뛰어난 필력을 자랑하지만 ‘시귀’와 같은 마구에 가까운 변화구 스타일에서 본연의 장점을 드러내는 작가다.
책은 전나무로만 이루어진 산림으로 둘러싸인 마을 ‘소토바’를 배경으로 한다. 이곳에 외부인이 이사를 오면서 주민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하나둘 죽기 시작한다. 시귀(屍鬼)란 흡혈귀와 좀비의 중간쯤 되는 존재인데, 작품은 외부와 고립된 마을에 재앙처럼 시귀가 퍼지며 벌어지는 사투를 그리고 있다.
‘시귀’를 읽으려면 (다소) 인내심이 필요하다. 흡혈귀·좀비의 습격에서 주인공이 살아남는 서바이벌 액션 장르와는 전혀 다르다. 작가는 어느 한쪽을 ‘물리쳐야 할 괴물’로 정의 내리지 않는다. 종족 대 종족, 서로 다른 가치관과 서로 다른 생존 수단이 부딪치며 벌어지는, 암울하고 고통스럽기까지 한 사투에 대한 이야기다.
어쩌면 이 작품은 더위를 잊게 만들기보다 끈적함과 습기에 무게를 더할지도 모른다. 모순되지만, 그래서 이 작품은 여름에 읽어야 마땅하다. 한순간 시원하고 통쾌한 탈출을 감행할 수도 있지만, 진득하게 마지막까지 이야기를 견뎠을 때, 몸 속 깊은 곳에 침전해 있던 것이 스르륵 올라왔음을 느끼는 순간의 카타르시스는 또 다를 것이기 때문에.
정명섭 소설가
라플란드의 밤|올리비에 트뤽|달콤한책
유럽 대륙의 북쪽에 버섯처럼 툭 튀어나온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북쪽을 라플란드라고 부른다. 스웨덴과 노르웨이, 핀란드, 그리고 러시아까지 걸쳐 있는 지역으로 끝도 없이 하얀 눈밭이 이어진다. 평균 기온은 영하 40도로 사람이나 동물이 살기에는 참으로 척박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오래 전부터 사미족(族)이 살고 있었다. 순록을 치며 살아가는 그들은 한때 그 땅의 주인이었지만 국경이 그어지고 백인들이 들어오면서 밀려나고 말았다. ‘라플란드’라는 용어 역시 이방인들이 붙인 이름으로 사미족에게는 모욕적으로 들릴 수 있다고 한다. 조선인을 뜻하는 일본어 ‘조센징’이 멸칭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사미족 순록치기 한 명이 시신으로 발견된다. 아울러 신성한 사미족의 북이 박물관에서 사라지는 일이 벌어진다. 분개한 사미족은 지나가는 차들을 멈춰 세우면서 항의 시위를 벌인다. 그런데 받아들이는 쪽에서는 자신들의 차가 막히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짜증을 낼 뿐, 사미족의 사연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사미족 출신의 순록 경찰인 클레메트는 야심 찬 파트너인 니나와 함께 사건 해결에 뛰어든다. 한 달 넘게 밤이 지속되는 극야 현상이 이어지는 가운데 순록치기의 죽음과 사라진 사미족의 북에 참으로 질기고 아픈 사연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프롤로그에 나온 것처럼 수백년 동안 계속된 사미족에 대한 탄압과 차별이 모든 일의 시작점이었던 것이다.
올리비에 트뤽의 ‘라플란드의 밤’은 독자를 낯선 라플란드로, 그리고 익숙한 폭력과 탄압, 살인과 탐욕의 세상으로 데리고 간다. 눈과 얼음, 그리고 순록밖에 없을 것 같은 라플란드에도 살인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오싹하게 만든다.
조동섭 번역가
심플 플랜|스콧 스미스|비채
폭설이 내린 숲 속. 얼음 낚시를 갔던 세 남자는 추락한 경비행기를 발견한다. 사람을 구하러 간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돈다발이 가득한 가방. 세 남자는 이 횡재가 기쁘기만 했다. 그때까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 440만달러가 자신들과 주변 사람 모두를 어떤 불행에 빠뜨리게 될지. 여기까지 읽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돈을 독차지하려고 서로 배신하고 싸우는 뻔한 이야기겠네. 바로 그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들려줄 때 우리는 거기 더 깊이 빨려들지 않을 수 없다.
1인칭 화자인 ‘나’를 주인공으로 펼쳐지는 이 소설은 현실적인 인물들의 살에 차가운 메스를 대고 그 속에 숨은 인간 본성을 끄집어낸다. 어쭙잖은 비유나 쓸데없는 잔가지 없이 오로지 주인공 ‘나’의 심리와 ‘나’의 눈으로 본 상황과 ‘나’의 행동을 묘사하며 500쪽이 넘는 책에서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작가의 뛰어난 역량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읽는 이의 내면을 건드리는 무엇이 있어 자꾸 생각하게 된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과연 나라고 해서 이 상황에서 달리 행동할 수 있을까? 샘 레이미 감독이 빌 팩스턴, 빌리 밥 손턴, 브리짓 폰다를 주인공으로 영화화하기도 했지만, 영화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에만 급급한 느낌이다.
주인공의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해서 읽는 이가 자기도 모르게 인물에 동화되어 몰입하게 되는 재미는 원작 소설에서만 느낄 수 있다. 미국에서 각종 매체와 독자의 찬사를 받으며 처음 출간된 것이 1993년이니 이제 30년 가까이 된 소설이지만 지금 읽어도, 다시 읽어도 여전히 재미있다. 아니, 아직도 꾸준히 읽히고 있으니 오히려 세월이 소설을 보장한다. 눈보라 치는 겨울, 외딴 작은 마을, 어둡고 냉혹한 인간 본성과 폭력, 책장을 덮을 수 없는 전개. 여름 더위를 잊게 할 요소는 다 갖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