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 살 봉 여사는 오늘도 출근합니다.’ 지난 30일 출간된 책 ‘구십도 괜찮아’(남해의봄날)의 부제다. 매일 경로당 간식 도우미 일을 하러 꾸준히 ‘출근’하는 90세 시어머니의 일상을 며느리 김유경씨가 재구성해 썼다. 이 출판사는 한글 학교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은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2019년), 전 세계 할머니들의 인생과 레시피를 소개한 ‘할머니의 행복 레시피’(2018년) 등을 꾸준히 내 왔다.

주체적인 노년의 삶을 보여주어 후배 여성들에게 각광받는 ‘할머니’들. 왼쪽부터 배우 윤여정, 유튜버 박막례, ‘밀라논나’ 장명숙씨. 윤여정은 출판사들이 탐내는 저자 후보 1순위로 꼽히며, 박막례 에세이‘박막례, 이대로 죽을 순 없다’와 밀라논나가 쓴‘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후크엔터테인먼트·ⓒ최승광·고운호 기자

지난달 나온 ‘사다 보면 끝이 있겠지요’(산지니)는 1929년생인 포항 김두리(92) 할머니의 사투리 듬뿍 구술생애사다. 손자 최규화씨가 일제강점기와 6·25 등 질곡의 세월을 겪은 할머니의 생애를 기록했다. 신지은 편집자는 “남성 이야기가 주도한 우리 현대사를 여성의 시각으로 들여다보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더 이상 고리타분하지도, 무력하지도 않다. ‘할머니’는 요즘 서점가에서 ‘핫’한 소재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올해 1~8월 ‘할머니’를 키워드로 한 도서 판매는 전년 동기 대비 47.1% 늘었다. 그중 판매량이 가장 높은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어크로스)는 지난해 5월 출간 이후 4만부 넘게 팔렸다. 그림책 전문가 박서영(필명 무루)씨가 어른을 위한 그림책과 함께 “홀로 아름답게 삶의 주체로 살아가는” 할머니들 이야기를 소개한다. 최윤경 어크로스 편집장은 “제목이 인상적이라는 독자 평이 많다”고 했다. 이 밖에 “지팡이는 아직 아니다. 캐리어를 끌자”며 여행 가방에 관절약, 소염제, 찜질팩을 넣고 해외로 자유여행을 떠나는 70대 할머니 김원희씨의 ‘진짜 멋진 할머니가 되어버렸지 뭐야’(달), 작가 하정씨의 북유럽 할머니 관찰기 ‘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좋은여름) 등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할머니’를 키워드로 한 책들.

이 같은 흐름은 출판 시장 주 구매층인 20~40대 여성들 사이에서 3~4년 전부터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소망이 유행하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황지영 남해의봄날 마케터는 “유튜버 박막례, 밀라논나, 미국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배우 윤여정 등 ‘나’를 지키면서도 멋진 노년을 사는 할머니들이 등장하면서, 젊은 여성들이 할머니의 삶에서 ‘걸크러시(여자가 봐도 멋진 여성)’를 발견하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고령화 시대, ‘폐지 줍는 할머니가 되면 어쩌지’ 하며 불안해하던 여성들이 명랑하고 씩씩한 할머니들의 모습을 보며 롤모델로 여기거나 마음의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다.

평생 허리가 굽어라 일만 하다 71세 때 인기 유튜버로 제2의 인생을 살게 된 박막례(74) 할머니의 책 ‘박막례, 이대로 죽을 순 없다’(위즈덤하우스)는 2030 여성들의 지지를 받으며 9만부 팔렸다. 80대 나이에 팔굽혀펴기를 하며 체력 관리하는 모습을 보여줘 ‘개간지 할머니’로 불렸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1933~2020)의 명언을 담은 ‘긴즈버그의 말’(마음산책)도 1만부 팔렸다. 스타일리시한 노년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밀라논나 장명숙(69)씨 에세이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김영사)는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됐다. 70대에 오스카상을 받아 전 세계를 감동시킨 배우 윤여정(74)은 요즘 출판사들이 저자로 영입하고 싶은 후보 1순위로 꼽힌다.

이른바 ‘귀여운 할머니’ 열풍이 워낙 거세자 비판의 목소리도 일고 있다. 최근 ‘비혼 여성 둘이 같이 살고 무사히 할머니 되기 프로젝트’라는 부제를 단 책 ‘여성 2인 가구 생활’(텍스트칼로리)을 만든 편집자 강제능씨는 “‘귀엽고 멋진’ 할머니가 될 수 있는 건 선택받은 일부 여성의 이야기일 뿐, 65세 이상 여성 1인 가구 빈곤율이 남성보다 훨씬 높은 현실 속에서 많은 여성이 과연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지 걱정한다”면서 “남성들은 ‘사장이 되고 싶다’처럼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노년을 그리는데 여성들은 그저 ‘귀여운 할머니’라고 뭉뚱그리는 상황도 씁쓸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