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그리고 다른 사람들

세라 브래퍼 허디 지음|유지현 옮김|에이도스|540쪽|2만5000원

인간의 아이는 모든 유인원 중 가장 크고 천천히 자라며, 가장 비용이 많이 든다. 그러나 인간의 출산 간격은 다른 유인원에 비해 짧다. 오랑우탄은 길게는 8년에 한 번 새끼를 낳고, 대형 유인원의 평균 출산 간격은 6년가량이지만, 수렵 채집민 기준으로 인간 어머니는 평균 3~4년 간격으로 출산한다.

인류학자이자 UC데이비스 명예교수인 저자는 이를 “인간이 ‘대행 부모’를 통한 ‘돌봄 공유’가 가능하도록 진화했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저자는 150만년 전 수렵 채집민인 호모 에렉투스의 생활을 토대로 ‘협동 번식’이라는 인간의 특성을 추적한다. 호모 에렉투스가 인류의 조상을 통틀어 지구에서 가장 오래 존속했기 때문이다.

침팬지 어미는 새끼가 생후 3개월 반이 되어야 몸에서 떼어놓는다. 오랑우탄 어미는 새끼가 생후 다섯 달이 되기 전에는 다른 오랑우탄이 안지 못하게 한다. 인간은 다르다. 중앙아프리카 수렵 채집민인 에페족의 경우 갓 태어난 아기는 낮 시간의 60%를 할머니, 이모, 아버지, 손위 누이 같은 ‘대행 어머니’에게 안겨 있다.

1969년 진화학자 존 보울비가 갓난아기와 어머니 사이의 정서적 유대를 강조한 ‘애착 이론’을 내놓은 이후 서구 사회에서는 어머니가 독점적으로 아이를 돌보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지만, 저자는 “영장류 276여 종 중 40~50%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끊임없이 돌보고 붙어있는 어미 노릇은 안전한 대안이 없는 영장류 어미의 마지막 수단이며, 돌봄을 공유하는 어머니는 진화적으로 전혀 특이한 존재가 아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은 진화적으로도 옳은 이야기다. 진화적인 관점에서는 아이의 생존이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대행 부모’로부터 사회적 지원을 받은 어머니가 아이의 요구에 더 잘 반응하기 때문이다.

손주를 돌보는 할머니. 저자는 “인류학은 생식 연령이 지난 여성을 무시해 왔지만, 평균적으로 높은 아동 사망률을 보이는 인구 집단에서는 할머니가 아동 생존율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게티이미지 코리아

‘대행 부모’ 중 으뜸은 외할머니다. 미국 연구에 따르면 미혼모가 낳은 아기나 소득이 낮은 가정의 청소년인 경우, 할머니와 한집에 사는 아이들이 인지 발달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는 경향이 있었다. 아프리카의 수렵 채집민 하드자족에서 가장 많은 식량을 채집해 오는 건 뼈와 가죽만 남은 노파들이다. 음식을 제공하는 할머니와 이모할머니가 있으면 아이들은 더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보릿고개가 있을 때, 할머니의 존재는 아동 생존율에 높은 영향을 끼쳤다. 저자는 “장수하는 할머니는 ‘인류의 에이스 카드’”라 말한다. ”번식 연령이 지난 후에도 오랫동안 사는 암컷이 진화한다. 이는 유아와 베이비 시터 간의 최적 비율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가장 유능한 남자는 자신과 아내, 그리고 자식들을 가장 잘 보호하고 부양하는 사람이었다”는 다윈의 주장은 ‘짝을 부양하는 사냥꾼’ 개념을 낳았다. 이를 바탕으로 “여성들은 자식을 부양할 수 있는 유능한 남성과 ‘섹스 계약’을 맺는다”는 가설이 진화론에서 인기를 끌었다. 저자는 “이는 수렵 채집민 집단의 평등성을 몰라서 하는 소리”라 말한다. “채집민들은 사냥감을 집단 전체와 나눠 가졌다. 남성의 사냥은 집단이 필요로 하는 칼로리의 절반이 채 안 되는 양을 제공했다.” 그는 “여성은 부성(父性) 지원이 불확실한 남성과도 짝을 맺는데, 이는 인류의 조상 때부터 ‘대행 부모’의 보완이 가능하도록 시스템이 유연했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육아에서 아버지보다 모계 친척 여성들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정부 저출산 정책 담당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돌봄 공유’가 있는 종(種)에서 유아는 더 빨리 자라고, 어미는 짧은 출산 간격을 두고 다시 번식한다”는 구절이 특히 그렇다. 집단의 다른 구성원이 ‘대행 부모’ 역할을 활발히 하는 비단원숭이과(科) 마모셋과 타마린 어미는 영장류 중 인간 어미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영아를 살해한다. “대행 부모의 도움이 부족하다 느끼는 어미는 생후 72시간 내에 새끼를 유기하는 경향이 있다.”

출산율이 낮아지는 건 여성이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라 혼자서는 도저히 키울 엄두가 안 나기 때문이다. 출산 지원금보다 더 필요한 건 사회적인 돌봄 시스템이다. 저자는 말한다. “18세기 유럽, 지독히 가난한 여성들이 아이를 기를지 유기할지를 판단하는 데는 모계 친척으로부터의 지원 여부가 소득보다 결정적이었다. 300년이나 지난 지금 육아에 대한 사회적 지원을 받기 어려울 것이란 인식은 독일이나 미국 같은 상업화된 나라의 여성들이 출산을 미루거나 아예 아이를 갖지 않기로 결정하게 만든다.” 원제 Mothers and Oth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