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古典)은 좋은 줄 알지만 선뜻 손이 안 가는 보약이다. 그래서 고전 묶음인 세계문학전집은 먼지 뒤집어쓴 채 책장 1열 지킴이가 되기 일쑤다. 이런 세계문학전집에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신년 초 ‘신(新)고전’을 내세운 세계문학전집이 잇따라 출간되고 있다.
은행나무출판사는 지난 7일 매달 한 권씩 출간하는 월간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에세(ESSE)’를 펴냈다. ‘에세’는 라틴어로 ‘존재’라는 뜻. 그 사이 가려진 여성과 장르 문학을 수면 위로 올리겠다는 포부를 담은 작명이다. 1월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를 시작으로, 매달 하나씩 추가해 해마다 12권을 낼 계획이다. 휴머니스트는 2월 초 세계문학전집을 공식 론칭한다. 4개월 단위 시즌제로 매 시즌마다 주제에 맞춰 5권씩, 해마다 15권을 펴낼 예정이다. 이와 관련, 작년 연말부터 지난 3일까지 클라우드 펀딩을 진행해 목표 금액을 678% 달성했다. 12일부터 펀딩 참여자에게 책 배포를 시작했고, 2월 초 서점 판매를 시작한다.
목록 구성도 닮은꼴이다. 핵심 키워드는 ‘여성’ ‘장르문학’ ‘초역’이다. 두 출판사 모두 100% 여성 작가 작품으로 전집의 시작을 알렸다. 출판계에선 처음 있는 일이다. 은행나무는 스타트를 끊은 ‘등대로’를 제외한 11권 모두 처음 번역되는 여성 작가 작품이다. 여성 고딕 소설의 정전(正典) 앤 래드클리프의 ‘우돌포 성의 비밀’, 조이스 캐럴 오츠의 스릴러 ‘밤, 네온’, 최초 여성 퓰리처상 수상 작가 이디스 훠턴의 ‘반마취 상태’ 등이다.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시즌 1의 테마는 ‘여성과 공포’다. 100여 년 전 여성 작가 5명이 쓴 공포소설을 선보인다. 메리 셸리가 100여 년 전 익명으로 발표했던 ‘프랑켄슈타인’, 찰스 디킨스가 사랑한 작가로 알려진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회색 여인’, 이디스 훠턴의 ‘석류의 씨’, 버넌 리의 ‘사악한 목소리’, 도러시 매카들의 ‘초대받지 못한 자’ 등이다. 대부분 초역 작품이다. 6월 ‘국경의 사랑’을 주제로 나오는 시즌 2에선 남성 작가 작품도 추가된다.
젊은 여성 번역가가 포진한 것도 눈에 띈다. 은행나무는 ‘등대로’(정영문 옮김)를 제외하고 여성 번역가를, 휴머니스트는 모든 책을 여성 번역가가 맡았다. 의고체(擬古體·예스러운 표현이나 문체)가 아닌 현대 감성에 맞는 경쾌한 번역을 시도하겠다는 의도다.
이 같은 변화에 대해 심하은 은행나무 해외문학팀 편집장은 “최근 젠더 감수성이 중요해지면서 여성을 대상화하는 일부 작품에 불편해하는 독자가 생기는 등 세계문학의 기준도 달라져야 한다는 공감대가 생겼다”며 “서구, 남성 작가, 순수 문학이라는 정전 틀에서 벗어나 비서구, 여성, 장르문학으로 스펙트럼을 다양화할 것”이라고 했다.
휴머니스트 황서현 주간은 ‘독자 접근성’을 강조했다. “최근 해외에서도 전형적인 고전 읽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고전을 읽자는 움직임이 있다”며 “지금의 눈으로 봤을 때 공감되고 읽기 즐거운 책을 선별하자는 마음으로 구성했다”고 했다. 기존 세계문학전집은 해당 언어의 문학 전공 교수와 평론가로 꾸려진 편집위원회에서 작품을 선정했지만, 두 출판사는 편집자들이 직접 기획한 뒤 번역자와 연구자에게 감수받는 과정을 거쳤다. “발로 뛰며 트렌드를 빠르게 포착하기 위한 방식”이라고 했다. 최근 젊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공포, 추리소설 비중이 높은 것도 이 때문이다.
판매 전략도 다르다. 은행나무는 ‘월간’ 발행, 휴머니스트는 TV 시리즈물처럼 ‘시즌제’를 택했다. 20~40대 독자층이 큐레이션된 상품을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구독 경제’에 익숙한 점을 받아들여 독자와의 접점을 넓히기 위한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