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한 파묵은 “낙관론자라 팬데믹이 곧 끝날 거라고 생각한다”며 “빨리 한국에 가서 박물관도 가고, 거리를 거닐고 싶다”고 했다. /민음사 제공

“과거에는 몰랐기 때문에 (전염병을) 두려워했다면 현대사회는 너무 많은 정보를 갖고 있어 두려워합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터키 출신 소설가 오르한 파묵(70·미 컬럼비아대 교수)은 코로나 시대 인류가 겪는 집단적 불안의 근원은 “넘쳐나는 정보”라고 했다. 최근 신작 ‘페스트의 밤’을 펴낸 파묵은 한국 언론과 한 서면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페스트의 밤’은 1901년 오스만제국 가상의 섬 ‘민게르’에서 페스트가 퍼진 이야기를 다룬 역병 소설이다.

전염병은 파묵이 40년 전부터 품어온 소재였다. “죽음은 형이상학을 생각하게 한다”고 했다. 집필 중 코로나가 터졌다. 팬데믹을 예언했다는 짜릿함보단 급조한 소설로 비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거장을 괴롭혔다. “2020년 3월 뉴욕에 있다가 코로나가 터져 허겁지겁 비행기를 타고 이스탄불로 돌아왔습니다. 터키 신문 1면에 격리시킨 하즈(성지순례자)가 탈출하는 사건이 실렸더군요. 쓰고 있던 소설에 나오는 사건과 똑같았습니다.”

서둘러 터키 언론에 소설 집필을 말하고, 뉴욕타임스에 관련 내용을 기고했다. 카뮈의 ‘페스트’와 비슷하다는 평에 대해선 “‘페스트’는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한 것을 페스트에 비유한 멋진 알레고리(allegory·우화)인 반면, ‘페스트의 밤’은 사실주의 팬데믹 소설”이라고 설명했다.

파묵은 예나 지금이나 감염병 시절의 공통점은 위정자의 기만이라고 꼬집었다. “정부, 대통령, 총리는 먼저 전염병을 부인해요. 현재 질서가 흐트러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까. 각종 소문이 계속 무성해지는데도 정부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죠. 방역관들이 강경하게 대처하면서 점점 권위적으로 변합니다.”

코로나는 치사율이 훨씬 낮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두려워했다. “대니얼 디포의 책 ‘전염병 연대기’(1722)를 보면 페스트가 창궐한 초반 사람들은 이 병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어요. 반면 이번 사태 초반엔 TV에 이탈리아에서 시체를 가득 실은 트럭이 지나갔어요. 예전엔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했다면 지금은 알기 때문에 두려운 거죠.”

팬데믹 시대 거짓 정보의 주범으로는 ‘인터넷’을 꼽았다. “소셜미디어, 인터넷이 등장했을 땐 더 잘 소통하게 되고 평화가 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신문은 정보를 약간 체에 거르고 점검하기 때문에 그래도 비교적 객관적인 정보를 내보내지만, 사람들은 기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가서 취재한 기사들을 믿는 대신 자신이 좋아하는 친구가 페이스북에 쓴 헛소문을 믿습니다.”

오르한 파묵이 수퍼마켓 카탈로그 속 마스크 쓴 사람을 따라 그린 그림. 한국판 표지에 실렸다. /©Orhan Pamuk

세밀화 같은 파묵의 치밀한 글쓰기엔 ‘바늘로 우물 파기’라는 수식이 따른다. “많은 참고 서적을 읽고 조사한 뒤 나중에 거대한 심포니 오케스트라처럼 작은 부분들 하나하나를 합친다”고 말했다. 이번엔 1897년에 나온 영국 런던 수퍼마켓의 카탈로그를 뒤져 마스크를 쓴 사람까지 찾았다. 파묵이 따라 그려 한국어판 표지에 실린 그림이다.

그는 순서대로 쓰지 않는다. 이번에도 첫 30페이지를 쓴 다음, 200페이지 이후를 두 번째로 썼다. “‘쓰다 보면 어떻게 되겠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철저히 계획을 세웁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설이 암(癌)처럼 사방으로 퍼지고 늘어져 3000페이지가 될 겁니다.”

이번 소설 속 화자는 여성 역사학자다. 파묵은 “앞으로 죽을 때까지 여성 주인공이 사건의 내부에서 모든 것을 보고 설명하는 방식의 소설을 쓸 예정”이라고 말했다. “중동 남성의 전형적이고 형편없는 사고방식이 있어요. 안타깝지만 제게도 존재하죠. 장 자크 루소가 말했습니다. ‘자신의 어머니와 다투는 남자는 항상 옳지 않다’. 페미니스트 비평가들과 싸우는 중동 남성들은 항상 옳지 않습니다(웃음).”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해선 “푸틴은 아주 원시적이고 나쁜 방법으로 ‘내 손에 핵이 있어, 거기에 간섭하지 마’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과거로 퇴보하는 상황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유명한 글 ‘중세로의 회귀’처럼 어떤 의미에서 중세가 다시 도래했다”고 안타까워했다.

파묵은 히치콕이 자신의 영화에 등장하는 것처럼 소설에 종종 나온다. 이번에도 소설 끝부분에 슬쩍 등장한다.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독자 여러분, 이것은 오르한 파묵이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지나치게 역사에 몰입하지 마십시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