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을 보다 | 마크 C 테일러 지음 | 임상훈 옮김 | 예문아카이브 | 504쪽 | 1만8000원

“암실에서 아버지에게 사진을 배우던 10살 무렵, 나는 검거나 하얗기만 한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모든 것은 다양한 색감의 회색이었다. 흰색과 검은색은 색이라기보다는 색이 없는 침묵과도 같았다.”

컬럼비아대 종교학 교수인 저자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유품을 정리하며 발견한 옛 사진들을 묵상하듯 오래 바라봤다. 오래된 흑백 사진 속에는 소음 이전의 침묵이 있었다. 파스칼, 칸트, 헤겔, 베냐민, 손탁…. 개인적 사진들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침묵’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묶여 수많은 철학자, 예술가, 작가들의 생각과 일화들로 나아간다. 바르트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발견한 사진 한 장에서 출발해 ‘카메라 루시다’를 썼고, 비트겐슈타인은 시끌벅적한 세기말의 빈을 떠나 노르웨이 북쪽 끝의 깊은 침묵 속에서 건축가의 꿈을 이룬다.

사람과 사람을 잇기 위해 발명된 테크놀로지 때문에 사람들은 점점 더 편협해진다. 소셜미디어는 자기 소리만 반사해 들려주는 닫힌 방과 같아서, 그 안에 갇히면 귀 기울여 듣는 방법을 잃어버리고 만다. 모든 것을 이분법으로 갈라치는 것이 일반화돼 버린 듯한 세상에서, 철학과 예술을 통해 발견하는 침묵의 힘은 소음으로 가득한 세상에 맞설 무기이자 치료약이다.

저자는 “침묵은 우리의 유일한 진짜 보물인 시간을 우리에게 돌려주고, 언어의 위협으로 굳게 봉인됐던 감각에 충격을 주어 우리를 깨어나게 한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