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아르테미시아|메리 D. 개러드 지음|박찬원 옮김|아트북스|320쪽|2만2000원

2018년 9월, 미 상원이 성추문 의혹이 불거진 브렛 캐버노 연방대법관 지명자를 인준했다. 피해자이자 증인으로 나선 여성이 남성 의원들로부터 조롱받자 여성들은 소셜미디어에서 그림 한 장을 공유하며 연대했다. 17세기 이탈리아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그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다.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된 이 그림의 주제는 조선 시대 논개 이야기의 구약성서 버전이다. 아시리아 군대가 어느 유대인 마을을 침략하자 부유한 과부 유디트는 연회를 베풀어 적장(敵將) 홀로페르네스를 초대한다. 유디트는 만취한 홀로페르네스를 하녀 아브라의 도움을 받아 살해함으로써 민족과 마을을 구해낸다. 극적인 소재가 즐겨 그려졌던 바로크 시대에 ‘유디트’는 화가들이 욕심낼 만한 주제였다. ‘바로크 미술의 거장’으로 불리는 카라바지오의 그림에서 유디트는 쏟아지는 피를 보고 역겨움을 감추지 못하는 가녀린 여인으로 그려진다. 반면 아르테미시아는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냉정하게 적장을 처단하는 유디트의 영웅적 면모를 전면에 부각시켜 차별화를 꾀했다.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된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 유대민족의 구원자 유디트를 정의를 실현하는 여성 영웅으로 그렸다. /아트북스

아르테미시아는 ‘최초의 여성주의 화가’로 불리는 인물. 그는 여성이 법적으로 아버지나 남편의 소유물이었던 17세기 유럽에서 명성 높은 예술인 길드인 ‘아카데미아 델 디세뇨’의 첫 여성 회원으로 받아들여졌다. 메디치가의 후원을 받았으며 프랑스, 잉글랜드 등 유럽 궁정의 의뢰를 받아 작업했다. 18세 때 화가였던 아버지의 동료에게 겁탈당한 일화가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아르테미시아의 ‘유디트’는 흔히 연약한 피해자의 ‘한풀이’쯤으로 해석돼 왔다. 그러나 미국 미술사학자이자 아메리칸대학 명예교수인 저자 메리 개러드(85)는 “미술 작품은 예술이지 심리요법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자”며 과도한 심리학적 해석을 경계한다. “아르테미시아가 강간범에게 그림으로 행한 복수는 여성 피해자의 방어적 심리 반응이 아니라 정의를 시(詩)적으로 행사한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는 아르테미시아의 그림이 유디트와 하녀라는 두 여성이 연대한 ‘정치적 행위’이며 그래서 이 그림이 남성 권력에 맞선 여성 저항을 상징하는 은유 단계로 올라갈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일개 화가의 딸 아르테미시아는 어떻게 메디치 가문과 유럽 왕실의 후원을 받을 수 있을까? 저자는 그 이유를 당시 치열했던 유럽의 젠더 갈등에서 찾는다. 1405년 프랑스 여성 시인 크리스틴 드 피장이 여신, 여왕 등 뛰어난 여성들을 조명한 ‘여자들의 도시’라는 책을 써 여성을 단지 남성을 유혹하는 존재로만 묘사한 남성 작가 장 드 묑의 ‘장미의 로맨스’를 비판한다. 이후 근 200년간 유럽은 남녀가 대립하며 여성의 속성을 논하는 이른바 ‘여성 논쟁’으로 들끓었다. 여성운동의 맹아가 이 시기 싹텄고 유럽의 왕비들은 여성 섭정을 정당화하는 논지로 ‘여자들의 도시’를 비롯한 여성주의 예술을 적극 차용한다. 이들은 여러 여성 예술가를 후원했는데 당대의 가장 유명한 여성 화가로 꼽혔던 아르테미시아도 그중 하나였다.

메디치 가문에서는 병약한 대공 대신 실권을 쥐고 있던 대공의 어머니와 아내가 아르테미시아를 후원했다. 루이 14세의 어머니인 안 도트리슈는 아르테미시아에게 자신을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로 묘사한 초상을 그리게 했다. 잉글랜드 찰스 1세의 왕비 헨리에타 마리아는 그리니치의 별궁 퀸스하우스의 천장화 작업을 맡겼다. 저자는 말한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페미니즘의 기원으로부터 잉글랜드와 미국으로 이어진 유산을 연결하는 한 사람으로서 19세기, 20세기, 21세기 페미니즘 활동가들에게 그 이념을 전달하고 있다.”

거대 야당 의원을 비롯, 정치인들의 성비위 의혹이 잇달아 불거진 이 시점에 특히 의미심장하게 읽히는 책이다. 단편적인 해석을 피하고 학계의 여러 논의를 복합적으로 숙고해 잘 쓴 저서. 국내에 소개된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관련 책 중 그를 단독으로 다룬 것으로는 현재 유일하다. 2001년 소설가 함정임이 번역한 전기 소설 ‘불멸의 화가 아르테미시아’(민음사)가 나왔으나 절판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