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과 소비에트 변방 기행|임영호 지음|컬처룩|348쪽|2만2000원
변방은 수탈당하고 역사에서 지워진다. 조지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는 유럽과 구 소비에트 연방에서 모두 변방 취급을 당했던 나라다. 이들 국가는 흔한 여행 정보 책자조차 찾기 쉽지 않다. 이 세 나라에 대한 여행기를 펴낸 임영호(65) 부산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와 16일 전화로 만났다. 그는 “여행은 주관적이고 우연적일 수 있지만 편협한 세계관을 넓히는 것이어야 한다”며 “현지 경험을 이해하고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책으로 내게 됐다”고 했다. 맛집 얘기와 볼거리 대신 변방의 역사를 눌러 담았다.
먼저 우크라이나의 독립 의지를 느끼게 한 에피소드부터. 우크라이나는 천문학적인 액수를 들여 소련 흔적 지우기에 나설 정도로 독립국임을 강조하고 있다. 2015년 4월 우크라이나 정부는 공산주의 상징물을 모두 불법화했다. 기념물, 거리·도시 이름, 교과서에 적힌 표현을 모두 바꾸는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당시 추산으로는 전국적인 지명 변경에만 15억달러(약 1조8000억원)가 필요했다. 1인당 GDP가 4000달러도 안 되는 유럽 최빈국이지만 우크라이나는 이를 강행했다. 2016년에만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거리 이름 5만개, 1000개에 달하는 도시와 마을 이름이 바뀌었다. 이 시기 철거된 레닌 동상만 1320개에 달한다고 한다. 구소련 방식대로 ‘위대한 조국 전쟁’이라고 교과서에 적혀 있던 전쟁은 우리에게 익숙한 ‘제2차 세계대전’이 됐다.
왜 이렇게까지 ‘역사 지우기’에 나섰을까. 저자는 여행지에서 수탈과 억압의 역사를 읽어낸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 있는 ‘황금 돔 수도원’은 이 지역이 동슬라브 종주국이었던 ‘키예프 루스’(882~1240년)의 수도였던 시절 처음 세워졌다. 그러나 20세기 초 키이우를 세력권에 넣은 구소련은 이 성당을 관공서로 쓰기로 했다. 12세기 무렵 만들어진 모자이크는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러시아 각지 박물관으로 흩어졌다. 소련은 황금 돔을 해체했고, 성당 건물과 종탑은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했다. 1936년 벌어진 일이다. 민족 정체성 말살 전략을 떠올리게 한다. 지금 서 있는 ‘황금 돔 수도원’은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에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이 교수는 “우크라이나는 자신들이 동슬라브의 본류이자 비잔틴 제국의 계승자라고 생각하지만, 러시아는 소련의 변방 정도로 취급하는데 이런 양국의 인식 차이가 크다”고 했다.
키이우의 ‘황금 성문’은 우크라이나라는 변방의 찬란했던 역사를 상징한다. 전성기였던 키예프 루스 시절 ‘남대문’ 역할을 했다고 알려진 문터에 복원한 구조물이다. 그는 “쌓다가 만 건물 비슷한 볼품없는 유적이 공터 한가운데 외딴섬처럼 서 있었다”며 “오리지널도 아니고 원래 모습도 알려지지 않은 것을 1982년 추정 복원한 것”이라고 했다. 전·후면은 붉은 벽돌로, 성벽이 있어야 할 부분은 목재로 마감한 모습이다. 모습이 전해지지 않는 황룡사를 상상에 따라 복원한 셈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이 황금 성문은 우크라이나인에게는 한국인이 광개토대왕 시절 강토에 느끼는 자부심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벨라루스는 협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에 가면 러시아와의 유대를 단박에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벨라루스는 러시아보다도 소련 모습을 더 잘 보존하고 있는 ‘타임캡슐’ 같다”며 “모스크바에서는 소련 시기 유적이 거의 보이지 않아 놀랐는데, 벨라루스에서는 소련 문양과 레닌 동상이 일상적으로 발견돼 놀랐다”고 했다.
우크라이나처럼 유럽과 가까워지다가 러시아에 침공당한 조지아는 국내에서는 인지도가 높지 않은 곳이다. 그는 “그리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가 독수리에게 간을 쪼였던 카우카소스산이 조지아의 카즈베기산”이라며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면서 지켜온 문화를 목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 된 한국인들이 ‘멋있었다. 맛있었다. 재밌었다’ 이상의 여행 경험을 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책을 썼다고 했다. “고풍스럽고 낭만적인 겉모습 밑에 깔린 상흔에 주목할 때 새로운 면모가 드러난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세 나라에 대한 책이지만, 다가온 휴가철에 어떤 여행을 할지 묻는 책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