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재미교포 작가 이민진의 소설 ‘파친코’ 한국판의 첫 문장이었다. 과거형으로 쓴 이유가 있다. 판권 문제로 절판된 지 석 달 만인 27일 발간되는 개정판에선 이 문장 번역이 이렇게 바뀐다.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영어 원문은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fail’의 해석이 ‘망쳐 놓다’에서 ‘저버리다’로 바뀐 것이다.
소설의 첫 문장은 작품을 함축하는 문장이자 글밭으로 인도하는 입구. 작가에겐 가장 중요한 문장일 수밖에 없다. 특히 파친코의 첫 문장은 책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를 대변하는 문장이자 선언이다. 번역된 문장이 워낙 강렬해 책은 안 읽었지만 첫 문장은 들어봤다는 사람도 많다. 2019년 남화연·정은영·제인 진 카이젠 세 미술 작가가 참여한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의 전시 제목으로 차용될 만큼 유명한 문장이 됐다.
첫 문장을 바꾸게 된 것은 지난 5월 국내 판권이 인플루엔셜로 넘어가면서 번역을 통째로 다시 했기 때문이다. 기존 번역의 저작권은 문학사상에 있다. 번역가 신승미가 참여한 개정판은 이전 번역본과는 꽤 다르다. 인플루엔셜 관계자는 “의역을 줄이고 최대한 원문을 살려 새롭게 번역한다는 생각으로 개정판을 만들었다”며 “첫 문장이 워낙 중요해 ‘첫 문장의 무게’를 고심해 번역한 것으로 안다”고 했다. 한 출판사 대표는 “새로운 번역을 강조하려면 출판사 입장에선 첫 문장 변경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작가 생각은 어떨까. 13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민진 작가는 “두 번역 모두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작가는 “나는 소설의 첫 문장을 주제문(thesis sentence)으로 삼는 작가다. 일반적으로 소설가가 쓰지 않는 방식”이라고 했다. 그는 “파친코의 첫 문장은 역사에서 평범한 일반인들의 삶은 잘 드러나지 않지만 진정 역사를 만드는 것은 그들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쓴 문장”이라며 “‘fail’은 ‘disappoint’ ‘let us down’(실망시키다)의 의미에 가깝긴 하지만 두 번역가의 단어 선택을 존중한다”고 덧붙였다. 이 작가는 번역을 평가하는 대신 번역가에게 지지를 보냈다. “번역은 또 하나의 예술 형식이며, 번역가는 문학계의 천사(the angels of the literary world)다. 충분한 보수도, 충분한 인정도 받지 못하지만 이야기에 대한 세계적인 이해를 제공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존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