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드 코로나’ 이후 처음으로 여름휴가 시즌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묵혀둔 짐가방을 꺼내 야심 차게 휴가를 준비하는 당신. 예전과 다른 ‘특별한 휴가’를 보내고 싶을 것이다. 서점가에 각종 정보 담긴 여행 가이드는 넘쳐나지만 정작 각 지역 정취를 느낄 수 있을 만한 책에 대한 안내는 많지 않다.
Books는 강원·충청·전라·경상·제주, 다섯 지역 출판·서점인으로부터 휴가지로 떠나기 전에 읽으면 좋을 책들을 추천받았다. 강원도로 떠나기 전 영동 음식에 대한 이야기로 입맛을 먼저 돋우고, 전라도로 향하기 전 곽재구 시 ‘와온바다’를 읽으며 고요히 철썩이는 파도를 눈앞에 떠올려보자. 책은 어디까지나 애피타이저일 뿐. 책장을 덮고 여행을 나서면 책 속에 스며있는 지역의 풍미가 자연스럽게 당신을 그 곳으로 안내할 것이다.
[강원]
동쪽의 밥상
엄경선 지음|온다프레스|240쪽|1만5000원
설악산 일기
김근희, 이담 지음|궁리|396쪽|3만8000원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서래(탕웨이)는 논어를 인용하며 자신의 알리바이를 입증하려 한다.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智者樂水),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仁者樂山).” 지혜로움에도 인자함에도 이르지 못한 나는 슬쩍 가정형 문장으로 말을 바꿔 스스로에게 돌려준다. “지혜를 얻고 싶다면 바다로 가고, 너그러운 마음을 구하려면 산으로 갈 것.” 올여름, 푸른 동해 바다에 깃들고 설악산 바윗돌에 기댈 당신에게 책 두 권을 소개한다.
음식과 맛집에 대한 정보는 넘쳐나지만 정작 무엇이 ‘진짜’인지 분간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포털 사이트에 ‘속초 음식’을 검색해 보면 기원이 불분명한 온갖 음식들이 나열된다. 진짜 그 지역 음식을 가려 준다는 점에서 ‘동쪽의 밥상’은 영동 음식 감별사다. 먼 옛날 조선 시대에서부터 저 위 함경도까지, 시공간을 넘나들며 영동이라는 땅에 존재했던 음식들과 거기 얽힌 사연을 소개한다. 한 예로 여름철 속초 별미인 오징어를 꼬들꼬들한 산오징어회로 먹게 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1980년대 중반부터다. 잡기가 무섭게 죽어버리는 오징어를 산 채로 운송하기 위해, 소형 어선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배에 활어통을 장착하기 시작한 덕분이다.
나이가 들면서 산이 좋아진 게 아니라, 닮고 싶은 사람이 있어 산이 좋아졌다. 2010년, 화가이자 그림책 작가인 부부는 설악산에 매료되어 연고도 없는 속초에 둥지를 틀었다. 매주 산에 올라 바위틈과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작은 생명들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2020년까지 무려 10년 동안의 뭉근한 기록이 모이고 엮여 ‘설악산 일기’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다. 두 사람이 걸었던 ‘깔딱 고개’를 문장으로 따라가 보고, 두 사람이 그림으로 옮긴 ‘큰앵초’를 더듬어 보다가, 어느새 그들의 뒷모습 따라 봉정암을 향해 걷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순전히 닮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그들이 바라본 들꽃들이 내게도 보일까 하는 마음에, 그 너그러운 마음이 내게도 스며들까 하는 기대에 설악산에 오를 짐을 챙긴다. /김영건 속초 동아서점 대표
[충청]
관촌수필
이문구 지음|문학과지성사|484쪽|1만5000원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박범신 지음|은행나무|324쪽|1만4000원
충청도로 휴가를 계획한다면 서해안을 떠올리게 될 테다. 그중 대표 지역으로 머드 축제로 유명한 보령을 꼽을 수 있겠다. 이곳에 간다면 머드 축제를 즐긴 후 잠시 관촌마을을 가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어눌한 듯 찰진 보령 사투리가 오감을 자극하는 이문구의 ‘관촌수필’ 배경이 된 곳이다.
작가는 고향에서 겪은 자전적 경험을 토대로 1970년대 급격한 도시화로 피폐해진 고향 마을을 애잔하게 그리고 있다. 논술계의 교과서로 불리며 널리 회자된 탓에 한 번쯤 읽어봤을 테지만 실제로 가본 사람은 드물 것이다. 작품의 배경이 된 관촌(冠村)은 현재의 보령 대천동. 그렇지만 지금의 대천동은 관촌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거니와 그 흔한 카페나 상점도 없는 평범한 마을이다. 그래서 작가가 느낀 고향의 애틋함이 더 다가올 수도 있다. 이번 휴가길에는 소설 속 관촌을 걸어보자. 관촌수필의 여섯 번째 이야기 ‘관산추정(關山芻丁·고향의 옛 친구)’의 한 구절을 음미하면서. “세월은 지난 것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새로 이룬 것을 보여줄 뿐이다.”
바닷가 마을을 둘러봤다면 평야가 드넓게 펼쳐지는 논산으로 가보자. ‘논산 일기 2011 겨울’이라는 부제가 붙은 박범신의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를 펼치면서. 2011년 논산으로 귀향한 작가가 호수가 보이는 조정리 집에서 쓴 일기를 모은 것이다. 이 글이 더 실감나는 건 작가의 문학적 감수성을 키워준 고향에서 썼기 때문이기도 하다. 끝없이 펼쳐지는 논산평야를 걸으며 배고팠던 어린 소년을,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옥녀봉에서 문학 전집을 탐독했던 청년 작가를, 기차가 지나갈 때면 방 벽이 떨리던 강경 집의 젊은 날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조정리 탑정호 호숫가를 걷다 보면 문학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식지 않은 작가의 목소리가 들려올지도 모른다. “조정리는 낚시하는 마을이란 뜻이다. 내가 낚아야 할 것은 역사에 깃들어 있는 의미 있는 기억의 편린들이다.” /유정미 대전 이유출판 대표
[경상]
경주 남산
강운구 지음|열화당|125쪽|4만원
우포늪, 걸어서
손남숙 지음|목수책방|264쪽|1만7000원
한 번도 가 본 적 없었을 적에도 오랫동안 내게 남해는 금산으로 기억되었다. 이성복 시인의 ‘남해금산’ 때문이다. 아름다운 시구에 사로잡혀 언젠가 남해에 간다면 꼭 금산에 오르리라 결심했던 것도, 마침내 금산에 올라 보리암을 향하는 동안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읊조리던 이도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남해에 금산이 있다면 경주에는 남산이 있다. 사진작가 강운구의 ‘경주남산’은 한 권의 시집에 함축된 ‘남해 금산’과 같은 울림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수천 년의 시간이 빚어낸 자연과 문화재가 어우러진 풍경 속에서 건져 올린 빛과 그림자는 시와 사진이라는 구분이 무색하게 그 자체로 시적이다. 형언할 수 없는 장엄한 자연은 우리를 사색의 시간으로 이끈다. 그때 비로소 예술은 탄생하는 것이 아닐까. 아직 경주 남산에 올라본 적은 없지만, 오래도록 마음속으로 금산을 그려왔듯 경주 남산은 강운구 작가의 사진으로 남아 어느 날엔가 발길을 이끌지 않을까 기대한다.
예술가를 사로잡은 또 다른 지역의 풍경으로 우포늪이 있다. 창녕이 고향인 손남숙 시인은 2015년 시집 ‘우포늪’에 이어, 2017년 ‘우포늪, 걸어서’라는 제목의 생태 에세이집을 냈다. 시인의 시선을 따라 거대한 습지에 깃들여 사는 생명들을 가까이에서, 천천히 관찰하며 걷는 동안 그 고요한 풍경에 함께 물들어 갈 것만 같다. 우포늪은 하루에는 다 걸어서 볼 수 없을 만큼 넓고 고즈넉해 이곳에서는 시간도 천천히 흐를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 광활한 풍광 속에서 인간은 참으로 작은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올여름 복잡한 도시에서 벗어나,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잠시나마 태고의 자연이 간직한 신비로운 풍경 안에서 나를 잊는 시간을 맞이해 보는 것은 어떨까. 직접 가보지 못해도 괜찮다. 종이 위 작가의 시선을 통해 마음에 남은 풍경들이 언젠가 당신을 그곳으로 이끌어 갈 테니. /박소희 통영 남해의봄날 편집팀장
[전라]
김탁환의 섬진강 일기
김탁환 지음|해냄출판사|408쪽|1만7800원
와온 바다
곽재구 지음|창비|134쪽|9000원
미스터리 공포 영화 ‘곡성’을 보고 밤잠을 설쳤다. 그리고 다짐했다. 곡성이라는 지역은 절대 가지 않으리! 4년 전 서울에서 전남 순천으로 이주한 뒤 곡성이 지척임을 알았지만, 선입견은 곡성의 짙은 안개처럼 꽤나 두터웠다. 그런데 역사·사회파 소설가 김탁환 작가가 서울을 떠나 곡성에 삶터를 마련했다는 의외의 소식을 들었다. 지난해 서울을 완전히 떠나 곡성에 거처와 집필실을 마련하고 농사도 짓는다고 했다.
사계절을 오롯이 보내며 초보 농부이자 마을 소설가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일군 그의 ‘제철 마음’이 ‘김탁환의 섬진강 일기’ 속에 여물었다. 작가의 눈으로 다시 만난 곡성은 누군가의 삶과 세계를 끊임없이 확장시키는 생명력 가득한 공간이었다. 땅과 원고를 오가며 온종일 창조적인 작업을 하고 또 내일을 기대하는 순정한 마음의 작가가 농부 과학자 이동현 박사와 함께 채식식당과 생태책방이라는 길을 내고 쉼터까지 마련해 놓았다. 이젠 그곳으로 떠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서울을 떠나 지역 이주를 고민하던 때, 몇몇 지역을 방문해봐도 선뜻 결심이 서지 않았다. 그러다 북토크 행사로 들렀던 순천에서 마음을 열었다. 순천만의 아름다운 노을 풍경을 보며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한 안온한 느낌을 받았다. 자세히 둘러보니 따뜻한 그 이름 때문에 언제고 가보길 소원했던 ‘와온바다’가 순천만과 이어져 있었다.
곽재구 시인의 시 ‘와온바다’는 이렇게 시작된다. ‘해는 / 이곳에 와서 쉰다 / 전생과 후생 / 최초의 휴식이다.’ 여름 바다라면 하얀 백사장과 푸른 파도가 철썩이는 이미지를 생각하겠지만, 와온의 풍경은 다르다. 갈대밭, 철새, 낙조로 대표되는 와온은 생명을 껴안은 바다이자 성실한 갯마을 사람들의 삶터이다. 많은 이들이 북적이는 관광지는 아니지만, 오히려 그래서 온전한 고요와 휴식의 정거장이 되어준다. 시집에 유독 자주 등장하는 마을의 꽃향기, 별과 달, 바람과 나무 들을 하나하나 찾아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다. 시어를 통과해 신비로움을 머금은 풍경들로 우리 여행은 더욱 각별해진다. /천소희 순천 열매하나 대표
[제주]
푸른 바당과 초록의 우영팟
김민희 지음|앨리스|200쪽|1만3500원
오래된 신들이 섬에 내려오시니
전건우 외 5인(전혜진, 정명섭, 황모과, 김선민, 사마란) 지음|들녘|352쪽|1만6000원
‘제주의 맛’ 하면 보통 흑돼지나 갈치 요리를 많이 떠올린다. 나도 처음 제주에 여행을 왔을 때에는 유명 맛집에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주에 정착을 하고 보니 여행할 땐 보이지 않던 다양한 식재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제주 출신 저자가 제주의 다양한 식재료와 그와 연관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쓴 ‘푸른 바당과 초록의 우영팟’은 제주 맛의 추억을 더 깊고 진하게 해 줄 책이다. 특히 인상 깊은 음식 이야기가 있다. 친구와의 갈등으로 마음이 헛헛해진 저자가 할머니를 찾아갔더니, 할머니는 위로의 음식으로 ‘닭엿’을 정성껏 고아주셨다. 닭고기와 엿이라니, 무슨 맛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 낯선 조합. 오래 전 제주에서는 고기 먹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그때 귀한 닭을 잡아 정성껏 달여 만든 것이 닭엿이다. 할머니는 손녀 마음을 위로하고자 닭살을 바르고 엿기름을 짜고, 팔이 아프도록 저어가며 닭엿을 직접 달여주었다. 울고 싶으면 실컷 울라고 토닥이며 내어준 닭엿, ‘달달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맛’에 사랑이 묻어있다.
밤바람에도 더위가 묻어 있는 날이라면 작은 전등 하나 켜놓고 ‘오래된 신들이 섬에 내려오시니’를 읽어보길 권한다. 제주 설화를 SF 작가 6명이 코스믹 호러로 재해석한 작품을 모은 책. 코스믹 호러는 ‘감당할 수 없는 우주적 존재’를 마주하게 된 인간이 겪는 아득한 공포에 대한 장인데, 보통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악의 세계를 다루지만 이 책엔 인간의 욕망이 불러온 파국, 역사적 사건이 초래한 비극 등이 담겨 있다.
여행하는 중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면 어떤 기분일까? 살아보겠다고 한껏 발버둥 치는 인간의 악한 내면을 마주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 책을 읽는 당신은 쓰레기를 더 열심히 줍고, 주변 사람들을 더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 제주 곳곳 잠들어있는 신을 노하게 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후텁지근한 여름 대기가 문득 누군가의 찬 입김처럼 서늘하게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음은 물론이고. /박진희 제주 소리소문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