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만 기다려 줘! | 브리타 테켄트럽 지음·그림 | 김서정 옮김 | 주니어RHK | 32쪽 | 1만3000원

늦은 오후 집으로 가는 길. 지는 해의 붉은 빛이 나뭇잎 사이로 반짝일 때, 작은 고슴도치가 앞서 성큼성큼 걷던 큰 고슴도치를 부른다. “잠깐만 기다려 줘! 해가 다 내려갈 때까지 같이 기다려 줄래?” 둘은 사이 좋게 풀밭에 앉아 해가 지는 모습을 오래오래 바라본다. “어서 가자, 너무 늦었어.” 큰 고슴도치가 말하지만, 작은 고슴도치는 이내 또 멈춰 선다. “잠깐만 기다려 줘!”

가만히 기다리며 천천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법 같은 순간들이 만들어진다. 무의미했던 찰나에 의미가 생겨나고, 목표만 생각하며 바삐 걸을 때는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생명들이 눈에 들어온다. 어쩌면 사랑은 기다려주는 것,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두 고슴도치는 달이 밤하늘로 여행을 시작하는 모습을 오래 바라본다. 들판의 꽃들이 뽐내는 향기를 함께 맡는다. 높은 나무 위 둥지의 부엉이, 연못의 개구리와 물고기에게도 하나하나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넨다. “저 날아다니는 예쁜 빛 봤어? 정말 마법처럼 반짝이네!” 어두운 풀숲 위로 춤추던 반딧불이가 날아오르면, 밤하늘엔 별이 쏟아질 듯 가득하다.

/주니어RHK

볼로냐 라가치상 스페셜 멘션에 두 번 선정된 독일 작가의 책. 판화와 콜라주 기법을 활용해 평면 위에 부드럽게 입체감을 빚어낸다. 고슴도치 가시털은 까슬까슬 손에 닿는 듯하고, 나방과 잠자리의 날개 무늬, 갈대와 풀숲의 질감, 연못의 수면이나 뽀얗게 번지는 불빛 같은 세부 묘사도 매력적이다.

큰 고슴도치와 작은 고슴도치는 부모와 아이, 혹은 교육자와 학생일 수도 있다. 한눈팔지 말고 빨리 가자고 채근하기 전에, 기다리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