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요조가 자신의 산문집 ‘만지고 싶은 기분’에 사인하며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을 통해 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마음산책

“만져진다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지난 1월 나온 가수 요조 산문집 ‘만지고 싶은 기분’ 면지(面紙·책 표지와 본문 사이의 종이)에 저자 사인과 함께 적힌 문구다. 초판 3000부 한정으로 저자 친필 사인을 인쇄해 제작했는데 출간 다음 날 모두 판매되고 중쇄에 들어갔다. 요조는 책 출간 직후 동료 작가들에게 증정할 책에 사인을 하며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을 통해 팬들과 만나기도 했다. 이날 찍은 사진을 올린 요조의 인스타그램 게시물엔 2400명이 ‘좋아요’를 눌렀다.

친구의 필적(筆跡)마저 잊고 사는 디지털 시대에도 저자 사인본은 여전히 힘이 세다. 온라인 서점에 머그컵이며 노트, 독서용 램프 등 각종 굿즈가 넘쳐나지만 신간 판매에 가장 효과적인 건 저자 사인본이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는 “출판인들끼리 ‘종이책과 전자책의 가장 큰 차이는 저자 사인 가능 여부’라는 농담을 하곤 한다. 책은 대량생산되는 복제물이라 저자가 직접 흔적을 남긴 사인본이 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고 했다. 정 대표는 “3000부 이상 사인할 경우 저자가 힘들 걸 고려해 친필을 인쇄해 사인본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 인쇄본이라도 독자들의 호감도가 높아지므로 서점에서 더 많이 가져간다”고 덧붙였다.

양희정 민음사 인문교양팀 부장은 “굿즈가 흔해져 여기저기서 다 비슷한 것들을 만들다 보니 효과가 예전 같지 않다. 환경 문제를 악화시킨다며 굿즈 제작에 반감을 갖는 독자들도 있고, 보관 및 배송 등 관리도 쉽지 않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출판사가 추가로 비용을 지출할 필요가 없고, 독자들도 좋아하고, 서점도 환영하는 사인본 제작이 가장 ‘가성비’ 좋은 마케팅 방법이라는 것.

신간을 낸 저자 북토크를 유튜브로 중계하면서 생방송 중 책을 구입한 독자에게 저자가 이름을 언급하며 즉석에서 사인해 택배로 부쳐주는 ‘랜선 사인회’도 코로나 발발 이후 유행중이다. 2021년 9월 교보문고가 론칭한 ‘랜선 팬사인회’엔 김연수, 김영하, 한강, 박상영 등 인기 작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진영균 교보문고 과장은 “1시간 방송 동안 평균 300~400부 팔린다. 오프라인 사인회보다 높은 수치”라고 했다.

팬층이 확실한 저자여야 사인본 마케팅이 힘을 발휘한다. 이연실 이야기장수 대표는 “성공한 전작(前作)이 있으면 확실히 효과가 있다. 친필 사인본을 이벤트로 크게 걸 때는 저자들에게 힘들더라도 메시지 하나라도 공들여 넣어달라 부탁한다”고 했다. 서명이 너무 간단하면 독자들로부터 ‘성의 없다’는 불만이 제기되기도 한다는 것. 초판 한정 사인본은 보통 500부 이상 제작하는데, 이 경우 면지만 저자에게 보내 사인을 받은 후 책을 제본할 때 끼워넣는다. 책 표지를 일일이 펼쳐 가며 사인하는 것보다 제작 전 미리 면지에 사인하는 편이 저자 입장에서 품이 덜 들기 때문. 최근 출간된 김훈 소설 ‘하얼빈’, 이슬아 소설 ‘가녀장의 시대’, 정여울 산문집 ‘가장 좋은 것을 너에게 줄게’ 등이 모두 초판 사인본을 이런 방식으로 만들었다. 예전엔 ‘내가 산 책을 작가가 만지며 사인했다’는 걸 독자들이 기대했기 때문에 신비감을 주려고 면지에 사인하는 모습을 공개하지 않았다. 디지털 미디어의 발달로 ‘사인본의 비밀’이 알려진 요즘은 오히려 면지를 잔뜩 쌓아놓고 사인하는 모습을 영상이나 사진으로 찍어 홍보용으로 활용한다.

달필(達筆)인 저자들은 다른 저자들보다 유리한 고지를 점한다. 이연실 대표는 “시인 이병률은 캘리그래피 수준의 아름다운 필치로 이름나 있고, ‘무심한 남자 어른의 필체’인 소설가 김훈의 글씨는 굳이 다른 문구를 덧붙이지 않아도 독자들이 좋아한다”고 말했다.

사인을 원하는 독자가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모든 저자가 사인본 제작을 반기는 건 아니다. 사인이란 어떤 측면에선 저자의 시간과 노동력을 쥐어짜는 일이기 때문이다. 소설가 장강명은 산문집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에 사인본 제작을 일종의 ‘불쉿 잡(Bullshit job·무의미한 일)’에 빗대며 이렇게 썼다. “요즘 출판계에서는 초판 사인본 제작이 유행이다. 몇몇 작가들은 1쇄 물량 전체에 사인을 해달라는 요구를 받는다. 출판사에는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거절하련다. 며칠씩 사인 기계 노릇을 할 게 아니라 그 시간에 자기 글을 몇 줄이라도 더 쓰는 게 작가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