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스타코비치, 시대와 음악 사이에서
엘리자베스 윌슨 지음|장호연 옮김|돌베개|854쪽|5만5000원
레닌이 망명을 끝내고 귀국한 1917년 4월. 환영 인파 속에 어린 쇼스타코비치(1906~1975)도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훗날 소련 대표 작곡가가 되는 그가 일찍부터 혁명에 공감했다는 근거로 자주 나오는 일화다.
쇼스타코비치는 굳이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당시 기억이 없다고 했고, 오랜 친구는 “쇼스타코비치의 ‘이데올로기적 순수성’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지어냈다고 본다”고 했다. 영국의 첼리스트로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로스트로포비치를 사사한 저자는 이 의심스러운 이야기에 대해 “작곡가 본인이 조장한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스탈린 치하에서 아슬아슬하게 숙청 위기를 넘나든 쇼스타코비치로서는 자신의 ‘순수성’을 뒷받침하는 일화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저자는 이 방대한 전기를 쓰면서 편지와 기존 전기를 비롯한 문헌을 검토하고 주변 인물들을 직접 인터뷰했다. 체제의 폭압 아래에서 쇼스타코비치가 좀체 드러내지 않았던 본모습에 접근해 간다. 천재 작곡가이자 다정한 친구, 아버지이기도 했던 쇼스타코비치의 여러 얼굴이 입체적으로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