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정부에선 ‘실태를 점검하겠다’고 말하더군요. ‘구름빵’이 이슈가 됐던 10년 전에도 똑같은 얘길 했었죠. 결국 다시 이런 일이 생겼는데 또 ‘점검하겠다’니…. 다음에 다른 창작자가 또 비슷한 고통에 처하면 그때도 또 점검할 건가요. 이건 그냥 ‘희망 고문’이에요.”
최근 출판사 등과 송사를 벌이던 만화 ‘검정 고무신’의 그림 작가 고(故) 이우영(51)씨의 비극적 사건이 알려진 뒤, 많은 이가 백희나(51) 작가와 그의 책 ‘구름빵’을 떠올렸다. 비 오는 날 구름 반죽으로 만든 빵을 먹은 아이들이 두둥실 하늘로 떠오르고, 아침을 거르고 출근했던 아빠에게 구름빵을 가져다주는 가슴 따뜻한 이야기. 작가는 데뷔작이었던 ‘구름빵’을 내놓은 이후 활발한 작품 활동을 통해 ‘아동문학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추모상을 받았다. 하지만 ‘을(乙)’이었던 신인 시절 맺은 출판사에 저작권을 모두 넘기는 계약 때문에 ‘지옥’을 경험했다. 저작권 소송을 했지만 2020년 7월 최종 패소했다. 수상 이후 처음 스웨덴을 방문 중인 작가는 바쁜 행사 일정 중 짬이 날 때마다 십여 분씩 전화 인터뷰에 응했다.
―다시 ‘구름빵’ 사건이 언급된다.
“오죽했으면 1심 선고를 기다리다 그러셨을까. 슬프고 안타깝고 또 조심스럽다. 나도 트라우마에서 못 벗어나 아직도 치료받고 있다. ‘내가 죽으면 다 해결될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캐릭터에 딸 이름까지 붙였던 ‘구름빵’의 모든 것이 창작 의도와 무관하게 찢겨 공연, 전시, 애니메이션, 속편으로 팔려나갔다. 출판사가 다른 작가의 책을 내면서 ‘구름빵 제작진이 다시 뭉쳤다’고 광고하더라.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었다. 팔다리를 생으로 잘라내는 듯한 또 다른 차원의 고통이었다. 말 그대로 피눈물이 멈추지 않는 20년 세월이었다.”
―창작을 못 했던 기간도 있었다.
“창작자는 그렇게 한 번 꺾이면 다시 일어나기가 정말 힘들다. 신인 시절 ‘구름빵’ 계약 이후 1인 출판으로 ‘달 샤베트’를 낼 때까지 2004~2010년 7년간 창작을 할 수 없었다. 가장 왕성히 작품 활동을 할 30대 초였는데. 생계를 위해 일러스트를 그리고 백화점 디스플레이 하청 등을 하다가 안면마비까지 왔다. 재판 과정에서 잊으려 애썼던 과거의 상처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는 것도 너무 힘들었다. 감아놓은 붕대를 다시 풀어서 상처를 다시 헤집는 것 같았다. 가장 슬펐던 건 더 이상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된 거였다.”
―'구름빵 방지법’ 얘기도 나왔는데.
“결국 국회를 통과 못 하고 흐지부지됐다. 창작자의 저작권을 지켜주는 시스템 유무는 사회적 인식의 차이이고, 상식의 수준을 정하는 기틀의 차이다. 시스템이 있으면 문화도 달라질 수 있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될까.
“힘의 불균형이 있다. 작가는 개인이고 상대는 기업이다. 법무팀을 가진 기업이 내미는 계약서에서 계약이 시작된다. ‘구름빵’ 때도 처음부터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같았다. 신인 때 계약하며 ‘왜 믿지 못하냐’ ‘다 이렇게 한다’는 말을 들었다. ‘당신만을 위해 계약서를 수정하는 건 형평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창작자들은 계약에 대한 법률 지식도 부족하고 익숙지 않은 데다, 대개 감정적이고 관계 중심적인 성정이어서 민폐가 될까 봐 그런 말을 그냥 믿고 따른다.”
―출판 업계에선 손해를 감수하며 신인 작가를 데뷔시키고 있다고 반박한다.
“작가의 저작권을 지켜줘야한다는 의미가 이익의 배분 문제와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작가의 권리를 지켜주는 것이 출판사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투자 위험을 안긴다는 건 잘못된 논리다. 출판사와 작가는 용역 관계가 아니다. 저작권과 투자금을 혼동한다면 그건 여전히 작가를 돈 주면 물건을 납품하는 용역 업자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런 문화가 여전히 존재한다. 창작자의 권리에 대한 기본적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작가들 역시 좀 더 당당하게 동등한 파트너의 입장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어떻게 바뀌어야 하나.
“중요한 건 저작권이 작가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을 내면서 처음 정한 돈만 받느냐 인세로 팔리는 데 비례해 받느냐는 협의의 문제일 뿐이다. 저작권이 여기에 포함돼 통째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 독일 등 일부 유럽 국가에서는 처음부터 저작권은 창작자의 것이고 양도할 수 없게 돼 있다고 한다. 작가는 정해진 기간 창작물에 대한 사용권을 빌려주는 형식이어야지, 저작권을 양도하는 것은 금지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인식 전환이 필요한가.
“책이 기본 매체이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2차 저작물로 더 넓게 확장되는 시대다. 콘텐츠의 주인인 작가가 동등한 입장에서 진행할 수 있도록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기업들도 콘텐츠를 만드는 작가의 역량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생각해주면 좋겠다. 지금이 바로 창작자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제도적 개선과 인식 전환이 필요한 전환기인 것 같다.”
―요즘은 예전 같은 불공정 계약은 사라지지 않았나.
“신인 작가들이 겪는 일을 들어 보면, ‘구름빵’ 이후 저작권에 대한 경각심은 확실히 커졌다. 어떤 작가들은 2차 저작권은 아예 빼고 본격적으로 논의할 사항이 있을 때 다시 이야기하자고 요구하기도 하고 변호사 검토도 받는다. 하지만 여전히 신인들은 계약서 수정을 요구하다 ‘당신 작품이 그렇게 대단한 줄 아냐, 그럼 하지 말라’는 경우를 당한다고 들었다.”
―창작자는 선이고, 출판사는 악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싸우자는 게 아니다. 작가와 출판사는 파트너다. 상생하는 파트너십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작가의 권리가 보장되면 좀 더 자유롭고 풍요로운 환경에서 안심하고 창작할 수 있지 않겠나. 창작자의 저작권이 잘 보장되고 믿고 일할 수 있으면 작가들이 더 좋은 콘텐츠를 창작해 낼 수 있다.”
―저작권 역사와 인식이 다른 선진국 수준으로 갑자기 올라설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언제까지 우리는 상황이 다르다는 말만 할 건가. ‘구름빵’만 해도 이미 20년 전, ‘구름빵’의 저작권 문제가 관심받고 널리 언급된 것이 10년 전의 일이다. 지금 또 다른 작가의 비극이 일어났다. 상황에 끌려다니기만 하면 상대적 약자인 창작자들을 보호할 수 없다. 그런 말은 변명이 될 뿐이다.”
―구름빵 소송에서 패소한 뒤 후배 작가들에게 너무 미안했다고 했었다.
“다른 작가들이 불공정 계약서에 사인할 때 구름빵도 이렇게 했다고 하면 선례가 되는 것 아닌가. 지금은 시간과 비용을 써가며 다소 껄끄러운 과정을 통해 작가가 주도적으로 개입된 계약의 형태를 만들어가고 있다. 나도 이런 일이 익숙지 않고 작가의 천성에서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선례를 만들어간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이런 선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돈 문제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작가에겐 저작권이 돈이 아니다. 출판사를 비롯한 사업체 입장에서는 그게 경제적 가치로 연결되는 건 당연하다. 작가는 돈이 아니라 작품의 본질을 지키고 싶은 것이다. 저작권을 작가가 본질적으로 가지게 해달라는 건 누구에게 불합리한 부담을 지라고 하는 얘기가 절대 아니다. 저작권이 작가에게 있다면 거기에 맞춰서 또 다른 계약을 하면 된다. 작가가 원하는 것은 창작물에 대한 권리를 영구적으로 가져가서 작가의 창작 의도와 다른 형태로 변형되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결국 저작권은 작가가 마음껏 창작을 확장해나갈수 있는 기본 장치이자 자신의 작품의 본질을 지키는 장치이다. 이것을 지켜주는 것이 출판사에게 위험과 부담을 안겨준다는 것은 잘못된 논리이다. 사업체들은 진행하는 사업에 알맞은 이익분배의 방식을 작가와 협의하면 된다.”
―제도 개선만이 정답일까.
“조심스럽고 죄송스럽지만, 이런 계기가 있을 때 움직이지 않으면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 제도가 바뀌면 상황도 따라온다. 상황이 제도를 쫓아가면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 지금대로 가면 10년 뒤에도 똑같이 끔찍한 일이 생길 수 있다. 슬프지만, 저는 언제든 실망할 준비가 돼 있다. ‘이번에도 이러다 말겠지. 상처 헤집어 놓고 또 이러다 말겠지. 아무것도 안 나올 수도 있겠지’ 그런 생각도 한다. 그러나,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해 이야기하고 싶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고. 바꿀 때가 됐다고.”
☞백희나
한국을 대표하는 그림책 작가. 2020년 ‘아동문학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스웨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추모상’을 받았다. 2004년 출간한 ‘구름빵’의 저작권을 놓고 출판사와 소송까지 갔지만 패소했다. ‘달 샤베트’ ‘알사탕’ ‘장수탕 선녀님’ 등을 펴냈다. 한국출판문화상, 미 보스턴 글로브 혼북 명예상 등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