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남은 “생각을 비우고 무아지경으로 쓸 때 가장 좋은 글이 나오더라”고 했다. 뒤에 걸린 그림은 화가이기도 한 조광호 신부가 별 보는 걸 좋아하는 그를 위해 그려준 유리화다. /이태경 기자

출판계에 ‘힐링’ 열풍을 불러일으키며 60만부 팔린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2008)를 냈을 때, 정신분석전문의 김혜남은 42세 때 발병한 파킨슨병으로 8년째 투병 중이었다. 그는 이듬해 후속작 ‘심리학이 서른 살에게 답하다’를 냈고, 이 역시 20만부 넘게 팔렸다. 그 후로 14년, 김혜남(64)은 여전히 베스트셀러 저자다. 그가 지난해 11월 낸 ‘만일 인생을 다시 산다면’(메이븐)은 지난 1월 13일부터 5주 연속 교보문고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며 20만부 팔렸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병의 한가운데에 있다.

지난달 서울 역삼동 자택을 찾았을 때, 김혜남은 거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근육이 굳어 말이 어눌하고 목소리가 작았다. 커피잔을 드는 것도 쉽지 않았다. 기자는 2015년 그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때보다 병이 많이 진행되었지만, 그는 “매일 운동치료를 받은 덕에 이제 세 발짝쯤은 혼자 걸을 수 있다”며 웃었다.

‘만일 인생을 다시 산다면’은 2015년 출간해 10만부 팔린 에세이 ‘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의 개정판이다. 투병 경험을 바탕으로 흔들리는 마흔 살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른바 ‘힐링’ 계열 책이지만 응석을 받아주지 않는다. 책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때론 버티는 것이 답이다’. 그는 고등학교 때 겪은 언니의 죽음, 직장 내 괴롭힘 경험, 고된 시집살이, 파킨슨병이라는 청천벽력 등을 이야기하며 “버티지 않고 어느 순간 포기해 버렸다면 삶이 쉬웠을지는 모르겠지만 참 많이 후회했을 것”이라고 썼다. “버틴다는 것은 기다림이라 할 수 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참아내는 것이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오늘 부단한 노력을 하는 것이다.”

그의 대표작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도 무턱대고 위로하기보다는 “서른 살 안팎 세대의 가장 큰 문제는 야단 맞는 것을 잘 견디지 못하는 것”이라며 조언하는 내용이다. “책 내자는 제안을 받고 ‘뻔한 소리를 왜 책으로 쓰냐’ 했더니 출판사 대표가 ‘선생님의 이야기는 특별하다’고 하더군요. 저는 환자들에게 이야기하듯 글을 씁니다. 어려운 말을 쓰지 않아요. 환자들 마음이 약해져 있기 때문에 너무 강한 말도 쓰지 않지요. 그래서 독자들에게 다가간 것 같아요.”

손가락이 자유롭지 않은 그에게 개정판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독수리 타법’으로 30분가량 작업하면 몸이 뒤틀려 이틀간 앓아누워야 했다. 김혜남은 “과정은 힘들지만 쓴 글을 보면 그래도 내가 아직 똑똑하다는 생각이 들어 좋았다”고 했다.

2001년 파킨슨 진단을 받은 이래 두 차례의 뇌심부 자극 수술을 포함, 여섯 번 수술을 받았다.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니 넘어져 팔이 부러지기도 하고, 어깨가 탈골되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지난해 유방암이 덮쳤다. “하느님이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지…” 말을 떼었다가 김혜남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계속 말을 이어갔다. “어느 날 꿈에서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노래를 불렀어요. 하느님은 너희가 행복하길 원하시지 고통받길 원하지 않는다고. 너희에게 닥치는 병도 살다가 발끝에 걸리는 돌부리처럼 우연히 만나는 것들일 뿐이라고. 그걸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하느님이 너희를 보는 눈이 달라진다고…. 잠에서 깨어나 깨달았어요. 이 고통은 내가 살면서 겪는 해프닝일 뿐이고,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헤쳐나가느냐에 따라 내 인생도, 가족들 인생도 달라질 거라는 걸.”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눈물을 훔치며 김혜남은 말했다. “아무리 고난이 닥쳐도 사람들은 결국 일어설 것이고, 극복해 낼 거라는 믿음이 생겼어요. 그런 마음이 내 글에 녹아들어 사람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도 눈물이 나는 건 어쩔 수가 없네요.” ‘병이 스승이다’라고 그는 책에 썼다. 병을 앓으면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폭이 넓어졌다는 것이다.

투병을 시작하며 병원 문을 닫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던 조현병 환자 한 명만은 집으로 불러 상담치료를 한다. 그 환자의 투병 일지를 책으로 엮는 작업을 하고 있다. 앞으로 꼭 쓰고 싶은 주제를 묻자 그는 “죽음”이라 답하며 천천히 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당의 라일락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김혜남의 ‘나를 버티게 하는 것들’]

요즘 즐겨 부르는 ‘어메이징 그레이스’

힘들 땐 노래를 부른다. 특히 팝송을 흥얼거린다. 내 감정이 노래로 표현이 되면서, 복잡한 생각이 없어져서 좋다. 며칠 전엔 꿈에서 질리올라 칭케티의 칸초네 ‘노노레타’를 부르고 있더라. ‘나이가 어린데’라고 우리나라에 소개된 노래다. 요즘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는 ‘어메이징 그레이스’다.

고통스러울 때 보는 영화 ‘지중해’

가브리엘 살바토레 감독의 영화 ‘지중해’(1991)를 좋아한다. 2차대전 당시 남자들의 유토피아를 그린 영화다. 군인들이 유토피아 같은 섬에 파견되는데, 결국은 다들 거기 남지 않고 집으로 돌아간다. 마지막에 그 남자들이 모여 ‘그리스인 조르바’ 같은 춤을 추는데 그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다. 그들은 왜 낙원을 버리고 굳이 고달픈 현실로 돌아가는 걸까?

나를 돌보고 견뎌주는 존재는 나 자신뿐

누가 나를 끝까지 돌보고 견뎌 주겠나. 내가 견뎌야지. 남편도, 아이들도 해 줄 수 없는 일이다. 삶이란 다 자기 자신이 견디는 거다. 나 자신이 끝까지 버티다가 그냥 흉하지 않게 세상을 떠날 수 있으면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