칩워

칩워

크리스 밀러 지음 | 노정태 옮김 | 부키 | 656쪽 | 2만8000원

2020년 8월 18일 대만해협에는 ‘칩워(chip war·반도체 전쟁)’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이날 미군 미사일 구축함인 머스틴호가 중국 본토와 대만의 경계인 이 해협을 가로질렀다. 같은 날 미국은 국가 안보 등을 이유로 중국 최대 통신 장비 업체인 화웨이를 무역 블랙리스트에 올린다고 발표했다. 반도체 등 첨단 산업 분야에서 급성장하는 중국을 견제하고, 미국의 패권을 확실히 하겠다는 선언이다. 해협 동쪽의 대만에선 세계 1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기업인 TSMC 공장이 쉼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칩워’는 반도체의 역사, 정확히는 이를 둘러싼 국가들의 ‘전쟁’에 주목한 책이다. 미국 터프츠대 플레처 스쿨에서 국제사를 가르치는 저자가 반도체 업계, 정부 관계자 등 100명을 넘게 인터뷰해 썼다. 1945년 미국 물리학자 윌리엄 쇼클리가 어떤 물질이 추가되면 전류가 흐르는 ‘반도체 현상’을 처음 발견한 순간부터 최근 미·중 간의 반도체 전쟁까지를 다룬다. 모리스 창 TSMC 창업자를 비롯한 반도체 산업의 주요 인물들과 반도체 전쟁에 참여한 국가들의 흥망성쇠를 중심으로 서사를 풀어나간다. 600쪽이 넘는 분량임에도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저자는 미국의 관점에서 반도체 전쟁에 참전하고, 스러져간 국가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반도체는 시작부터 ‘전쟁’의 성격이 컸다. 1960년대 초 미국과 소련 사이에 핵전쟁 위기가 커지면서, 더욱 정밀한 미사일 유도 장치를 만드는 과정에서 반도체 기술이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첨단 제조업 분야에서 뒤처졌던 소련이 미국의 반도체 기술을 베끼는 전략을 택하면서, 반도체 전쟁에서 점차 도태됐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최신 기술을 대만뿐 아니라 미국에도 동시에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화되고 있다”면서도 “현재로서는 워싱턴이 그것을 실행할 의지가 없다. 전 세계가 (반도체 공급을) 대만에 의존하고 있는 현 구도는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썼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적의 적은 친구다.” 저자는 1980년대 한국 반도체 산업이 성장하기 시작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미국은 소련에 맞서 민주주의 진영을 구축하기 위해, 전후 폐허가 된 일본의 반도체 등 산업을 지원했다. 그 덕에 일본은 소비자 가전에 들어가는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정상을 찍었다. 반면 1970년대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하고, 무역 적자가 쌓이며 정치·경제적 입지가 점차 흔들렸다. 거기다 일본 기업에 의해 자국 기업의 설 자리가 줄어들자, 미국 내부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1980년대 초 이런 기류를 인지한 이병철 삼성 창업 회장을 중심으로 한국 기업이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었고, 미국은 일본 대신 한국에 기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 한국과 마찬가지로 노동력이 비교적 저렴했던 대만의 반도체 산업도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누가 반도체 전쟁의 최후 승자가 될 것인가’라는 부제에 대한 해답을 책에서 명확히 찾기는 어렵다.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 70%’를 달성하겠다는 중국의 목표가 미국의 무역 규제에 가로막혔으나, 상업성보단 국가적 성과를 좇는 반도체 기업들과 막대한 인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저자는 반도체를 둘러싼 전쟁이 더욱 격화할 거라는 점은 확실하다고 말한다. 최근 들어 아마존, 구글을 비롯한 빅테크 기업이 스스로 반도체를 설계하고 있으며, 화웨이 등 중국 기업도 자체 개발에 힘을 쓰고 있다. AI(인공지능) 기술이 발달하는 가운데, 데이터를 더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반도체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저자는 “미래의 전쟁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반도체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 “한국이 향후 수년간 첨단 칩 제조의 핵심 생산자 지위를 유지하리라는 전망은 거의 모든 반도체 전문가가 동의”한다면서도 “한국 기업은 중국이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기술 수준과 격차를 유지해야만 한다”고 썼다. 물론 기술만으로 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작년 미국은 자국 내 반도체 공장을 짓는 기업에 세금 혜택을 주는 칩스(CHIPS)법을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한국 기업은 생산 설비가 있는 중국과 패권국인 미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만 하는 숙명에 놓여 있다. 책은 줄타기하는 심정으로 반도체 전쟁에 참여하는 한국에 아군과 적의 위치를 알려주는 지도가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