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론 머스크

월터 아이작슨 지음|안진환 옮김|21세기북스|760쪽|3만8000원

“셰익스피어는 가장 훌륭한 사람조차도 ‘결점(fault)’으로 주조된다’라고 말했다.”

출간 전부터 뜨거운 화제를 뿌린 월터 아이작슨(71)의 이 책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아마도 이 구절일 것이다. 아이작슨은 “셰익스피어가 말했듯이, 모든 영웅은 결점(flaw)을 가지고 있다. 어떤 결점은 비극을 낳고, 어떤 결점은 극복된다”고 썼다. 한국에서만 70만부 팔린 대표작 ‘스티브 잡스’(2011)에서 아이작슨은 막말을 내뱉고, 혼외 관계에서 낳은 딸을 부정하기도 한 잡스의 성격적 결함을 가감 없이 적었다.

미국 작가 월터 아이작슨의 저서 '일론 머스크'가 12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의 반스앤노블 매장에 진열돼 있다. /EPA 연합뉴스

일론 머스크(52) 역시 아이작슨의 날카로운 펜 끝을 비켜 가지 못했다. 책에서 머스크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학대당한 기억에 사로잡혀 종종 ‘악마’처럼 행동하고, 공감 능력이 결여돼 연인에게 “살이 쪄서 나를 쪽팔리게 한다”며 상처를 주며, 큰아들의 성전환에 충격받아 트위터를 인수해 버린 충동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아이작슨은 머스크가 2008년 페이팔 CEO에서 쫓겨났을 때, 회사 대변인을 맡고 싶다고 요구한 일화를 놓고 “’셀럽 병’에 걸렸다(He had been bitten by the celebrity bug)”며 냉소하기도 한다. 자신의 치부가 미화되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머스크는 아이작슨에게 전기를 의뢰했다. 2년간 아이작슨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걸 허용했으며, 주변 사람 130여 명을 인터뷰할 수 있도록 도왔다. 출간 전 원고를 보여달라 하지 않았으며, 책에 대한 어떤 것도 통제하지 않았다. 대체 왜?

일론 머스크./로이터 연합뉴스

◇영웅은 결점으로 주조된다

누군가의 전기(傳記)를 서술할 때 그가 얼마나 ‘훌륭한지’에 집중하는 우리와 달리, 서구의 전기(biography)는 그 인물이 얼마나 ‘인간적인지’에 초점을 맞춘다. 결점이 서사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동양에선 인격적으로 완성된 존재인 군자(君子)를 지향하지만 서구의 영웅(hero)은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초인적 경지에 이르는 존재다. 머스크는 서구적 영웅 서사에 완벽히 부합하는 인물. 그는 ‘세계 최고 부자’이자 민간 승무원을 우주 궤도에 보낸 최초의 민간 기업 스페이스 X 및 전기 자동차 시대 신호탄을 쏘아 올린 테슬라의 통솔자이지만, 어린 날 아버지의 학대, 친구들로부터의 따돌림, 부모의 이혼 등을 겪었다. 아이작슨은 책의 첫 문장을 이렇게 적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 일론 머스크는 고통을 이겨내고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학교 가는 일론./21세기북스

‘역경’은 책의 핵심 키워드다. 아이작슨은 ‘꽃길’을 걷기보다 ‘가시밭길’에서 피 흘리길 자청하는 머스크의 이상 심리가 여자 관계로도 이어진다고 분석한다. 신생아 때 사망한 첫 아들까지 여섯 아들을 낳은 첫 아내 저스틴, 3남매를 둔 현 여자 친구 그라임스, 배우이자 조니 뎁의 전처이기도 한 전 여자 친구 앰버 허드 등 파괴적인 성격으로 ‘혼돈을 자아내는’ 여자들에게 끌리는 패턴을 보인다는 것이다.

관제실 밖에서 여자친구인 그라임스, 그라임스와 낳은 3남매 중 막내아들 테크노 메카니쿠스(타우)와 함께./21세기북스

◇정자 기증으로 쌍둥이 낳은 이야기까지 공개

교제 중인 그라임스가 있는데도 “출산율 감소가 인류 생존에 위협이 되며” “똑똑한 사람들이 아이를 가져야 한다”면서 사귀는 사이도 아닌 자기 회사 임원 시본 질리스에게 정자 기증을 제안해 체외 수정으로 2021년 쌍둥이 남매를 얻은 이야기는 상식을 뛰어넘는다. 그러나 머스크는 아이작슨이 질리스를 취재하는 걸 말리지 않았다. 질리스 역시 “나는 비혼주의자이지만 모성 충동이 너무나 강했다. 익명의 기증자보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에게서 정자를 받고 싶었다”고 ‘쿨’하게 말한다.

일론 머스크(오른쪽)와 머스크가 설립한 회사 뉴럴 링크의 임원 시본 질리스(왼쪽)에게 정자를 기증해 체외수정으로 낳은 쌍둥이 남매 스트라이더와 애저. 아이작슨은 “질리스는 머스크가 아이들의 대부(代父) 정도의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머스크는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유대감을 형성했다”고 썼다. /월터 아이작슨 X(트위터)

평전(評傳)이라면서도 칭송 일색, 회고록이라더니 대필 작가들이 포장한 홍보용 책인 경우가 많은 우리 출판계와는 판이한 모습. ‘일론 머스크’ 국내 출판 담당자인 이리현 21세기북스 팀장은 “우리나라는 부끄러운 일을 남이 알지만 않으면 된다는 ‘수치심 문화’에 근거하고, 서구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신(神)이 다 알고 있다는 기독교적 ‘원죄(原罪) 문화’가 바탕이 돼 있어서 치부를 공개하는 것에 대한 온도 차가 있다”고 했다.

월터 아이작슨. /21세기북스

생전의 잡스도 아이작슨에게 “잔인하도록 진실 되게 써 달라”고 부탁했다. ‘스티브 잡스’ 국내 출판 담당자인 김윤지 민음사 차장은 “우리나라에선 전기류가 인기 없지만, 미국에선 저자 및 독자 풀이 워낙 크기 때문에 회고록(memoir) 시장이 중요하다. 회고록을 쓸 때 객관적인 시각을 선호하는 저널리즘 전통이 있고, ‘타임’ 편집장 출신인 아이작슨은 그 전통에 부합하는 저자”라고 했다.

2023년 4월 20일 스타십 발사 후 여자친구 그라임스(사진 맨 왼쪽), 어머니 메이(사진 맨 오른쪽)와 함께./21세기북스

◇역경을 거쳐 별에 이르도록

‘Per aspera ad astra(역경을 거쳐 별에 이르도록).’ 이 책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제임스 조이스 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나오는 이 라틴어 금언이 될 것이다. 머스크는 말한다. “나를 키운 것은 역경이었어요. 그래서 견딜 수 있는 고통의 한계점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지요.” 조울증 치료를 받지 않는 이유를 묻는 아이작슨에게 “내 정신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고통을 받아들이고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진정으로 신경을 쓰는 것”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언제나 ‘죽기 아니면 살기 모드’를 통해 삶의 동기를 찾곤 하는 이 일 중독자가 장인(匠人)이 만든 무료 식사와 요가 스튜디오, 유급 안식 휴가 등 ‘심리적 안전’을 중시하던 트위터의 조직 문화 체질 개선에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관제실에서 첫 부인 저스틴과의 사이에서 낳은 그리핀, 여자친구 그라임스와 낳은 아들 엑스와 함께./21세기북스

불안에 의한 악마적 충동을 성공의 동력으로 삼은 일그러진 자아의 소유자를 그려내며 아이작슨은 인간은 어느 한 부분만으로는 이해 불가한 복잡다단한 존재라는 점을 강조한다. 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나 로버트 하인라인의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 같은 SF 소설을 읽으며 우주 탐사를 꿈꾸고, 그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긴 이 외톨이의 이야기에 매혹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의 내면 역시 복잡하고 모순적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이작슨은 말한다. “때때로 위대한 혁신가들은 배변 훈련을 거부하고 리스크를 자청하는 어른아이(man-children)일 수 있다. 무모하고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고, 때로는 해를 끼칠 수도 있다. 그리고 미치광이일 수도 있다. 자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을 만큼 미친 사람 말이다.”

펜실베이니아대학 재학중 서부로 떠나 실리콘밸리에서 인턴십을 하던 1994년 7월의 일론 머스크./21세기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