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의 치유하는 소리|데이비드 조지 해스컬 지음|노승영 옮김|에이도스|608쪽|3만3000원

태초에, 소리가 없었다. 미국 생물학자인 저자는 올해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이 책에서 “지구 역사의 9할 동안 소통을 위한 소리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바다가 맨 처음 동물로 북적였을 때나 산호초가 처음 솟아올랐을 때는 어떤 생물도 노래하지 않았다. 뭍의 원시림에는 부름소리(call)를 내는 곤충이나 척추동물이 전혀 없었다. 그때 동물이 신호를 보내고 소통한 유일한 방법은 서로의 시선을 사로잡거나 촉각과 화학물질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런 탓에 수억년에 이르는 동물 진화는 침묵의 소통 속에서 펼쳐졌다.”

저자는 “45억년 지구의 역사에서 ‘소리’의 진화는 생물 진화사의 가장 극적이고 경이로운 장면이었다”고 말한다. 지구의 소리 역사에서 첫 5억년간 울려 퍼진 소리는 오직 돌, 물, 번개, 바람에서만 났다. 그리고 세균이 진동하며 만들어내는 음파와 초기 동물의 첨벙첨벙, 휙휙, 쿵쿵 소리가 30억년간 이어졌다. “생명은 여러 우발적인 소리를 냈지만, 소통을 위한 음성을 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생명 세계는 오래도록 침묵했다.”

숲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여성. 저자는 "숲에서는 식물이 동물의 음성을 약화하고 손상한다. 따라서 숲에 사는 새들은 대부분 탁 트인 지대에 사는 사촌들보다 느리고 소박한 소리로 노래한다"고 썼다. /게티이미지코리아

35억년간 오랜 침묵이 이어진 뒤 육상 세계에 최초의 노래를 선사한 것은 귀뚜라미다. ‘페르모스트리둘루스’라 불리는 고대 귀뚜라미가 화석 기록 중에서 아직 최초의 소리꾼으로 알려져 있다. 이 귀뚜라미는 두 날개를 비벼 마찰음을 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포유류의 선조들은 곤충의 소리를 듣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포유류의 귀에 고주파음을 전달하는 귀청과 세 개의 귓속뼈가 그때는 아직 진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구의 육지 소리가 오늘날처럼 활활 타오른 건 1억5000만년 전에서 1억 년 전 사이. 꽃식물이 진화하며 번성한 백악기에 들어서면서다. 1억5500만년 전 여치과가 등장했고, 백악기 후기가 되었을 때는 여치, 귀뚜라미, 메뚜기, 매미 등의 소리가 다채롭게 어우러졌다.

인간의 듣기 능력은 자궁 속에서 조금씩 발달한다. 20주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세상은 적막하지만, 약 24주가 되면 털세포가 뇌간의 기초적 청각 중추까지 이어진 신경을 통해 신호를 보내기 시작한다. 우리는 출생과 동시에 수생 환경을 벗어나지만 내이(內耳)의 털세포는 성인이 되어서도 체액에 싸여 있다. “우리는 태곳적 바다와 자궁의 기억을 속귀의 고리 속에 간직한다. 귓바퀴, 가운데귀방, 뼈 같은 나머지 귀 기관은 물이 담긴 이 핵심부에 소리를 전달한다. 그곳에서, 깊은 안쪽에서 우리는 수생 생물로서 듣는다.”

“장기적으로 보자면 우리가 지금의 인간 목소리를 가지게 된 것은 젖 덕분”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고대 원포유류(原哺乳類) 어미가 새끼에게 먹이던 젖 말이다. 젖먹이가 진화하기 전 원포유류 새끼들은 씨앗, 식물성 먹이, 소형 먹잇감 동물 등 주변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양분으로 삼았다. 젖먹이기 진화의 최초 단계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현생 동물의 DNA를 연구했더니 2억년 전 즈음 암컷 포유류에게 젖샘[乳腺]과 특수 유단백질이 생긴 것으로 밝혀졌다. 이 새로운 새끼 먹이기 방법이 진화하려면 새끼의 목이 재설계되어야 했다. 파충류는 빨지 못한다. 파충류의 주둥이, 혀, 목은 구조가 약하며 복잡한 근육을 지탱할 뼈대가 없기 때문이다. 포유류 진화 초기에 목에 있던 가느다란 V꼴 목뿔뼈[舌骨]가 네 개의 가지가 돋은 튼튼한 안장으로 바뀌었다. 근육들은 이 가지에 붙은 채 혀, 입, 후두, 식도를 강화하고 안정시켰다. “목뿔뼈의 주된 기능은 먹이 섭취를 뒷받침하는 것이었지만 진화는 이 뼈를 발성에도 활용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이 혁신들 덕에 인간은 언어 능력을 얻게 된다.”

결곡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생물의 진화와 소리의 진화를 교직(交織)했다. 과학서임에도 한 편의 시를 읽고 있는 것 같은 감흥을 준다. 코로나 19 봉쇄로 사람들의 이동과 산업 활동이 줄어들자 전례 없는 ‘지구적 고요’가 찾아들었다고 말하는 부분이 특히 그러하다. “이에 멧새들은 더 조용하고 낮은 노래로 돌아섰는데, 이는 수십년 만에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번역도 빼어나다. 원제 Sounds Wild and Brok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