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파란 대문을 열면

허은미 지음 | 한지선 그림 | 문학동네 | 52쪽 | 1만7500원

“하나, 둘, 셋….” 헤아리며 계단을 올랐다. “여섯, 일곱, 여덟….” 계단 숫자를 셀 때마다 파란 대문이 가까워졌다. “다녀왔습니다~!” 책가방부터 던져 놓고 쪼르르 다락방으로 뛰어올라가면, 작은 창 밖으로 온 동네가 내려다보였다. 아랫집 오빠는 마당에 놓인 빨간 고무 대야에 들어가 몸을 씻고, 큰길 구멍가게 앞에선 아이들이 이리저리 몰려 뛰어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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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농촌 할 것 없이 아파트가 솟은 요즘은 잊혀져가는 풍경. 동요처럼 리듬감 있는 문장이 수묵화처럼 정갈한 그림 선에 실려 독자를 과거 어느 땐가의 기억 속으로 데려간다. 파란 대문, 붉은 꽃, 노란 치마 같은 단색 색채가 문장 위에 찍힌 방점처럼 매 쪽마다 눈길을 사로잡는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치는 아이들 웃음소리, ‘이제 밥 먹어라’ 골목길을 향해 소리치던 엄마들 목소리가 책장에서 새어 나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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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꽃씨를 심어 햇볕 드는 대문 앞에 내어놓으면, 보랏빛 나팔꽃 줄기는 길다란 작대기를 휘휘 감으며 동네 애들처럼 쑥쑥 자라 환하게 꽃을 피웠다. 집집마다 마당 좁은 화단의 나무 가지며 꽃들은 얕은 담 위를 타고 넘어 골목길을 향해 뻗어나왔다. 겨울이면 집집마다 대문 옆에 흰 연탄재가 성처럼 쌓였고, 개구쟁이 꼬마들은 초인종을 누르거나 연탄재를 발로 차 쓰러뜨리곤 깔깔 웃으며 도망을 다녔다. 처음 장만한 집, 엄마는 재봉틀에 앉아 창문마다 달아 놓을 분홍색 꽃무늬 커튼을 만들었다. 흥얼흥얼 엄마의 콧노래에 드르륵 드르륵 재봉틀 소리가 음악처럼 장단을 맞췄다.

파란 대문을 열면 허은미 지음 | 한지선 그림 | 문학동네 | 52쪽 | 1만7500원

드론 카메라처럼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그림의 시점이 추억에 생생한 숨결을 불어넣는다. 독자의 시선은 파란 대문을 향해 계단을 뛰어오르는 아이를 뒤에서 쫓아가다가, 나팔꽃 구경 잘했다며 부침개를 부쳐오신 이웃집 할머니와 엄마의 대화는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게 된다. 해 질 녘 햇살은 툇마루 미닫이문의 통유리창으로 길게 그림자를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친구들 머리 위엔 서녘 하늘 노을이 불그스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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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 동네는 이제 재개발로 사라지고 없다. 꿈속에선 아무리 계단을 올라도 파란 대문이 나오질 않는다. 오후 풋잠에서 깨고 보니 아파트 발코니 화분 속 나팔꽃의 보랏빛만 예전 그대로다. 그때 그 골목길과 파란 대문은 사라졌어도, 기억은 오래 남아 사람을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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