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덤의 시대
마이클 본드 지음|강동혁 옮김|어크로스|312쪽|1만8000원
축구 팀 아스널(Arsenal) 철자를 뒤집어 딸 이름을 라네스라(Lanesra)라고 지은 아빠, 리처드 3세는 폭군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아마추어 역사가들, 온라인 커뮤니티에 모여 여자아이용 장난감에 대해 토론하는 중년 남성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뭔가의, 또는 누군가의 팬이라는 점이다. 모든 곳에 팬이 있다. 세계적 K팝 열풍부터 트럼프 지지자들의 미국 국회의사당 점거에 이르기까지 최근 두드러진 사회 현상 뒤에는 팬덤(fandom·팬들의 집단)이 있었다.
우리는 왜 팬이 될까? 팬덤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저자가 오늘날 개인들에게 어떤 집단보다도 강력한 소속감을 부여하는 팬덤을 사회심리학적 시각에서 파헤쳤다.
◇열정을 공유하며 정체성을 확인한다
팬(fan)이라는 말은 광신도(fanatic)에서 왔다. 팬덤은 열정을 공유하는 집단이다. “아주 많이 좋아하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책에 인용된 한 연구자의 표현은 뭔가에 빠지는 심리에 집단을 지향하는 방향성이 내재돼 있음을 시사한다. 팬덤은 정치 성향, 성적 지향, 문화적 취향 등을 아우르기에 어떤 팬덤에 속해 있는지가 곧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내집단(개인이 소속감을 가진 집단)과는 공유하고 외집단과는 공유하지 않는 무언가로 인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된다.”
이렇게 보면 팬픽(팬들의 창작물)도 음지 문화가 아니라 소수자의 전복적 서사가 된다. 팬픽 작가는 대개 여성이며 최근 성 소수자나 장애인 등으로 확대되는 중이다. 주류 문화에서 소외당한 이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더 잘 반영하는 방식으로 기존의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공유하며 소속감과 동질감을 느낀다는 설명이다. “팬들은 작품의 사회적·성적 역학 관계를 뒤흔들면서 힘과 해방감을 얻는다.”
연구 결과와 실제 사례를 풍부하게 인용하면서 팬덤의 특징을 분석한다. 런던의 셜록 홈스 박물관에 지금도 팬들의 편지가 쇄도하는 것은 팬과 스타 사이의 일방적 추종 관계가 가상의 존재를 대상으로도 성립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반응을 기대하기 어렵지만 거절당할 위험도 없다는 점에서 안전하게 애착의 감정을 경험하는 방식이다. 프리미어리그 축구 팬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최약체인 헐 시티 팬들이 가장 강한 유대감을 보인 반면 강팀 첼시 팬들은 유대감이 가장 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팬덤에선 승리보다 소속감 자체가 중요할 수 있다.
지탄의 대상을 추종하는 ‘다크 팬덤’도 있다. 미국 콜럼바인 고교 총격 사건 범인들의 팬 집단이 그런 경우다. 한 조사에서 이들은 자신들과 범인들이 각자 경험한 따돌림을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저자는 그 심리가 보통의 팬들과 본질적으로 같다고 지적한다. 이들이 사이코패스여서 범죄자의 팬이 되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극성 정치 팬덤 부작용도
팬 자체는 고대 그리스에도 있었지만 팬덤이 사회 현상으로 떠오른 것은 인터넷과 소셜미디어가 등장한 이후다. 초(超)연결 사회 들어 팬덤은 급격히 조직화됐고 권력을 얻었다. 여기엔 불길한 측면이 있다. 특히 정치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팬들의 비이성적이고 끈질긴 충성심이 정당 정치의 고질적 특성이 됐다.” 파티게이트(영국 보수당 정치인들이 코로나19 봉쇄 기간에 파티를 즐겨 물의를 빚은 일) 이후에도 보리스 존슨 전 총리가 높은 지지율을 보인 일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묻는다. “우리 편이 앞서기만 한다면 그들이 실제로 무엇을 하든 신경 쓰지 않는 걸까?”
더 심각한 문제는 극성 팬덤을 기꺼이 이용하는 정치인들이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재임 기간 끊임없이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M)’ 운동이나 ‘멕시코인’ 같은 대상을 지목하면서 지지자들의 분노를 조장했다. 당대표의 범죄 혐의를 수사하는 검사들의 신상을 공개하며 대놓고 ‘좌표’를 찍는 대한민국 제1당의 행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저자는 팬덤의 긍정적 영향력에 더 무게를 둔다. 백인 인종주의자들이 ‘백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해시태그로 BLM에 대한 반감을 표출할 때 K팝 팬들이 아이돌 영상에 이 태그를 단 일을 예로 들었다. 태그를 클릭해도 K팝 노래만 나오도록 해서 혐오 게시물을 묻어 버린 것이다. 팬덤은 “건설에 사용될 수도 있고 파괴에 사용될 수도 있는 다이너마이트 같은 것”이다. 그 폭발력을 어느 쪽으로 발현시킬 것인지가 우리 앞에 놓인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