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를 외치며 살아가라 ‘얼굴 없는 저자’의 철학
[자기 계발] 세이노의 가르침|세이노 지음
“삶에 비굴하게 질질 끌려가지 말라”고 일갈하는 얼굴 없는 저자의 책이 올 한 해 출판계를 평정했다. ‘세이노의 가르침’은 세상의 통념에 ‘세이, 노(Say, no)’ 하라는 내용의 자기 계발서. ‘세이노’라는 필명을 쓰는 저자는 스스로를 순자산 1000억원대 자산가라고 밝혔을 뿐 신상 공개를 꺼리고 있다.
지난 20년간 발표한 칼럼을 엮어 종이책은 시중의 절반 가격, 전자책은 무료로 배포했다. 올해 교보문고와 예스24 연간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며 자기 계발서 열풍을 견인한 책이기도 하다. 지역 도서관의 한 사서는 “선한 의도로 좋은 책을 낮은 가격에 공급하고 있다. 철학이기도, 인문학이기도, 자기 계발이기도 한 포괄적인 하나의 장르를 담아냈다”고 추천했다. /곽아람 기자
불안을 동력으로 삼은 기이한 ‘영웅’의 일대기
[평전] 일론 머스크|월터 아이작슨 지음
“셰익스피어는 가장 훌륭한 사람조차도 ‘결점(fault)’으로 주조된다’라고 말했다.” 출간 전부터 세계적인 화제였던 월터 아이작슨(71)의 이 평전은 일론 머스크의 빛과 그림자를 낱낱이 해부한다.
우주여행, 전기 자동차 등 인류를 새로운 세계로 이끄는 이 천재가 때로 ‘악마’처럼 구는 원인을 어린 시절의 학대 경험에서 찾는다. 불안을 성공의 동력으로 삼은 일그러진 자아의 소유자를 입체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역경을 극복하는 자가 영웅(hero)’이라는 메시지를 거듭 강조한다.
박소령 퍼블리 CEO는 “한 세대를 상징하는 인물 연대기를 통해 한 시대를 읽어낼 수 있는 책. 한국어 오리지널 콘텐츠로도 언젠가 이런 책을 읽고 싶다”며 추천했다. /곽아람 기자
”전셋돈을 모두 날렸다” 젊은 영혼의 투쟁 기록
[르포] 전세지옥|최지수 지음
전세 사기를 당한 1991년생 청년이 지옥에서 벗어나기까지의 기록. 최근 사회적 화두였던 ‘전세 사기’란 텍스트 너머, 잘 알려지지 않은 피해자의 절절한 이야기가 큰 공감을 얻었다. 저자는 빚을 내 마련한 첫 전셋집 보증금 5800만원을 모두 잃었다. 꿈인 파일럿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한 돈이었다. 원양 상선을 타며 돈을 갚고, 빌라 건물주 등을 상대로 법적 공방을 2년간 벌였다.
정부 지원의 사각지대에서 외로운 싸움이었지만, 결국 버텼다. 자신의 고통을 읽을 다른 전세 사기 피해자들에게 ‘버텨달라’며 손을 건넨다. 소설가 장강명은 “전세 사기라는 사회적 재난을 고발하는 르포르타주. 동시에 피해자로만 남아 있지 않겠다고 결의하는 젊은 영혼의 절절한 투쟁 기록”이라며 추천했다. /이영관 기자
포식자 도발, 싸움 걸어… 동물에게도 ‘중2병’ 온다
[생명 과학] 와일드후드|바버라 내터슨 호로위츠·캐스린 바워스 지음
진화생물학자(호로위츠)와 과학 저널리스트(바워스)인 두 저자는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유년기(childhood) 이후 성년기 전까지의 기간을 와일드후드(wildhood)라 부른다. 동물이 이 시기의 좌충우돌을 거치며 생존 확률을 높이고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고 설명한다. 동물도 사춘기를 겪는 셈이다.
포식자를 도발하는 등 와일드후드 동물들이 보이는 위험한 행동은 인간 청소년들의 겁 없는 행태를 연상시킨다. 실제로 청소년들의 부상·사망 확률이 성인보다 높다는 통계를 제시하며 이를 와일드후드의 영향으로 해석한다.
’중2병’ 같은 말이 놓치기 쉬운 성장의 의미를 새롭게 바라보게 해준다. “생명들의 이야기를 통해 어른들의 과거를, 아이들의 지금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교보문고 최지은 과학 MD) /채민기 기자
소셜미디어의 ‘좋아요’도 수많은 석탄을 소비한다
[환경] ‘좋아요’는 어떻게 지구를 파괴하는가|기욤 피트롱 지음
인터넷은 물리적 실체가 없는 ‘가상’ 세계일까. 그렇게 보일 뿐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환경 전문 저널리스트인 저자의 메시지다.
가령 소셜미디어에서 누른 ‘좋아요’는 해저 케이블, 데이터 센터 같은 인프라를 거쳐 전달된다. 천문학적 규모의 데이터를 감당하려면 더 큰 시설을 갖추고 더 많은 전기와 화석연료를 써서 유지해야 한다. 환경 문제에 민감하다는 젊은 층도 인터넷의 적극적 이용자로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환경 파괴에 가담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비(非)환경 디지털의 맨얼굴” “눈에 보이지 않던 디지털 세계의 물리적 무게감을 느끼게 한다”는 추천 평이 있었다. 최악 폭염을 겪으며 기후 변화의 영향을 체감한 올해 주목받은 환경 관련 책들의 대표 격으로도 볼 수 있다. /채민기 기자
’집중 저하’라는 유행병… 기후위기 대응에도 영향
[사회] 도둑맞은 집중력|요한 하리 지음
책을 보다가도, 마주 앉은 사람과 대화를 하다가도 틈만 나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것은 현대인의 공통된 습관이다.
미국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전 세계적 집중력 저하 현상이 일종의 유행병이라고 진단한다. 멀티태스킹을 요구하는 업무 방식, 줄어드는 수면 시간, 주의를 분산시키는 소셜미디어 등으로 인한 구조적 문제라는 주장이다.
기후 위기 같은 지구적 위기에 대응하려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데, 집중력 저하가 만성화된 상태에서는 승산이 높지 않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예스24 이용자들이 투표로 선정한 ‘올해 가장 사랑받은 책’ 1위에 올랐고, 교보문고가 집계한 연간 베스트셀러에서도 인문 분야 1위를 차지하며 호응을 얻었다. /채민기 기자
상실·결여는 ‘다름’일 뿐 장애를 불쌍히 여기지 마
[에세이]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이길보라 지음
‘코다(CODA·Children of Deaf Adults)’. 농인(聾人) 부모를 둔 청인(聽人) 자녀를 지칭하는 단어다. 영화감독이자 작가인 이길보라는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작품들을 통해 ‘코다’의 삶을 세상에 알려 왔다.
이 책은 ‘부모님이 귀가 들리지 않아 어떡하냐’는 연민 섞인 말을 들을 때마다 저자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서 출발했다. ‘나는 불쌍한 사람인가?’ 상실이나 결여가 단지 ‘다름’일 뿐이라는 답을 준 영화와 책 등을 소개하며, 장애인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과 동의어는 아니라고 말한다. 경제학자 우석훈은 “장애인 이동권 문제가 뜨거운 가운데 사회적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청각장애인에 대한 관심을 환기했다”며 ‘올해의 책’으로 꼽았다. /곽아람 기자
인생이 사무칠 땐 ‘이 책’… 자기 연민도 위안도 없이
[국내 소설] 각각의 계절|권여선 소설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소설이 건넨 이 말이 올해 수많은 이의 가슴에 박혔다. 인생이란 계절을 힘 들이지 않고 지나가려는 이가 많았다는 뜻일 테다. 권여선이 3년 만에 발표한 소설집의 인물들은 이처럼 병든 우리 모습과 닮아 있다. 모두 가까운 이의 죽음을 비롯한 과거에 사로잡혀 괴롭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기억을 되짚는다. 과거의 실체는 절망스럽지만, 한 줄기 빛이 있다. 지난 계절을 딛고 나서야 새로운 계절을 맞이할 힘을 얻는다.
김효선 알라딘 한국 소설·시 MD는 “인생이 이렇게 사무칠 때는 권여선의 소설처럼 말하고 싶다. 자기 연민 없이, 자기 위안 없이”라고 했다. 올해를 떠나보내기 전,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 /이영관 기자
보잘것없고 사소한 사랑… 그것이 내 세계를 지켰다
[해외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클레어 키건 소설
올해 강렬한 첫인상을 남긴 아일랜드 소설가 클레어 키건의 최신작. 간결한 단어와 문장으로 구성된 서사는 많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 20세기 아일랜드의 수녀원에서 자행된 인권유린을 소재로 삼되, 이를 바라보는 소시민이 주인공. 타인의 비극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으면 자신의 세계를 지킬 수 없는 그의 운명이 많은 독자에게 공감을 받았다. 김유리 예스24 소설·시 MD는 “보잘것없고 사소한 사랑이 지켜내는 ‘한 세계’를 담담하게 그려냈다”며 추천했다.
키건은 영화 ‘말없는 소녀’의 원작 소설 ‘맡겨진 소녀’가 지난 4월 국내에 처음 소개되며 호평받았다. 작년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이 소설도 킬리언 머피 주연의 영화로 개봉을 앞두고 있다. 국내외 문단에서 키건을 호명하는 현상은 내년에도 계속될 테다. /이영관 기자
어디든 틈만 있다면 활짝 피어날 수 있어
[그림책] 틈만 나면|이순옥 글·그림
맨홀 가장자리나 담벼락 갈라진 틈새에도 있다. 하수구 옆이나 전봇대 밑에서도 쑥쑥 자란다. 조금 답답한 곳이어도, 내가 주인공이 아니어도, 자리가 마련돼 있지 않아도…. 풀은 놀라운 생명력으로 도시의 틈을 비집고 올라온다. 작가는 하찮거나 귀찮게 여겨졌던 도시 속 풀들을 찬찬히 바라본다. 작지만 힘 있고 여리지만 당당하게 살아있는 풀의 다양한 얼굴을 만나게 된다.
이 작은 생명들도 담을 넘어 더 멀리, 혹은 벽을 타고 더 높이 올라 자기만의 춤을 추게 될 날을 그리고 있었다. 무채색 배경 위 초록 풀빛에서 배어나는 위로의 힘이 놀랍다. 서울 잠동초 김려은 사서교사는 “무심코 지나쳐버리는 수많은 틈 사이에서 자라난 무한한 생명력을 가진 풀꽃을 우리의 삶으로 표현해 낸 아름다운 그림책”이라고 했다. /이태훈 기자
[올해의 키워드]
팬데믹 터널을 빠져나와도 삶은 여전히 팍팍했다. 전 세계적 고물가와 경기 침체가 계속되고 역대 최악이라는 폭염이 지구를 덮쳤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말 촉발된 전세 사기가 전국으로 확산했다. 어렵게 마련한 돈으로 인생 첫 보금자리를 마련한 청년들도 큰 피해를 봤다.
조선일보 Books가 선정한 2023년 ‘올해의 책’ 10권 중에는 흔들리는 ‘안정’과 ‘안전’의 감각을 다각도에서 조명한 작품이 많았다. 이와 함께 꿈과 삶, 생명의 소중함을 담은 책들도 포함돼 위로와 용기를 주는 책의 힘을 확인시켰다.
저자의 얼굴도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세이노의 가르침’이 불확실성의 시대를 건너는 삶의 지혜를 건넸다. ‘전세지옥’은 악몽 같은 사기 피해에도 꺾이지 않는 꿈을 이야기해 공감을 얻었다. 기후 변화가 실존의 문제로 떠오른 가운데 ‘’좋아요’는 어떻게 지구를 파괴하는가’는 디지털 콘텐츠 소비가 기후 문제로 이어지는 과정을 파헤쳤다.
그림책 ‘틈만 나면’은 작은 틈에서도 피어나는 생명의 위대함을 잔잔한 필치로 묘사했다. 부커상 후보에 오른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내면의 도덕적 갈등에 직면한 인물을 통해 존엄성과 인간다움의 의미를 조명했다.
[누가 어떻게 선정했나]
‘올해의 책’은 본지 문화부 기자 5명과 북칼럼 필진 4명, 서점 MD 12명, 신구도서관재단을 통해 설문에 응한 전국 도서관 사서 48명 등 총 69명이 3권씩 추천한 책들 중에서 Books팀이 올해 국내외에서 두드러졌던 사회 흐름을 감안해 최종 선정했다.
문화부 기자 곽아람, 유석재, 이영관, 이태훈, 채민기
북칼럼 필진 박소령 퍼블리 대표, 우석훈 경제학자, 이수은 ‘평균의 마음’ 저자, 장강명 소설가
서점 MD 구환회·유한태·이주호·최지은(유아)·최지은(과학)·한재국·한지수(교보문고), 김유리·박은영·손민규·안현재(예스24), 김효선(알라딘)
도서관 사서 고정원(구산동도서관마을) 외 47명
총 69명·가나다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