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6일 서울 조선일보미술관 조이. '싸울게요, 안 죽었으니까' 책 낸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 김진주씨가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김지호 기자

지난주 나온 신간 중, 제 생각에 우리 사회에 가장 의미 있었던 책은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 김진주(가명·28)씨가 쓴 ‘싸울게요, 안 죽었으니까’가 아닌가 합니다.

김씨는 2022년 5월 부산 서면의 한 오피스텔 건물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일면식도 없는 30대 남성으로부터 머리를 수없이 짓밟히고 실신한 채로 발견됐습니다.

뇌손상이 와 당시 기억을 잃었고, 한쪽 다리에 마비가 왔는데 마비가 기적적으로 풀렸다는군요.

그래서 마비가 풀린 달, 6월의 탄생석인 ‘진주’를 필명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진주씨는 사건 초기만 해도 ‘내가 피해자니까 국가가 알아서 보호해 주겠지’라 생각했지만

경찰이 개인정보라며 가해자 이름도 알려주지 않아 가해자 재판 방청을 가서야 이름을 겨우 알 수 있었고,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도 뉴스를 보고서야 알았다고 하는데요.

심지어 1심에서 검찰이 살인미수로 20년을 구형했지만

법원은 전과 18범인 가해자가 출소한지 석 달 만에 다시 범행을 저지른 것임에도

반성 등을 이유로 감형해 12년을 선고했고,

진주씨는 이에 반박해 온라인 게시판에 ‘12년 뒤에 저는 죽습니다’라는 글을 올려 사건을 공론화했습니다.

‘싸울게요, 죽지 않았으니까’는 법원과, 경찰과, 세상의 시선과,

그리고 자기 자신과 싸운 1년 4개월간의 기록입니다.

인터뷰 기사 링크는 여기.

[“심신미약·반성 이유로 감형...사법체계가 괴물 만들어”]

저는 책이 나오기 전 언론 보도를 보고 ‘부산 돌려차기 피해자’가 책을 썼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요.

‘대체 언제 언론사에 릴리즈되는 걸까’ 기다렸는데, 지난주 월요일에 책이 도착했길래

바로 출판사에 연락해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수요일인 지난 6일 서울 광화문에서 진주씨를 만났습니다.

진주씨는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피해자’의 모습과 많이 달랐습니다.

160cm가 채 안 되는 자그마한 키, 활달한 부산 말씨로 “만난 기념이에요” 하며

푸른색 폼폰(pompon) 국화 한 송이를 건네더군요.

얼굴을 공개하지 않기로 하고 한 인터뷰라 사진촬영에 어려움이 많을 줄 알았는데,

“광고 PR 일을 해서 사진촬영을 한 번에 끝내야 일이 편하다는 걸 안다”면서

시원시원하게 먼저 포즈를 취했고,

시종일관 명랑하고 명확한 어조로 인터뷰에 응했습니다.

김진주씨가 기자에게 건넨 푸른색 폼폰 국화와 피해자 배지, 그리고 책./곽아람 기자

그가 인터뷰에서 가장 강조한 것은 법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면서,

피고인에게로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는 법의 균형이었습니다

‘피고인 방어권’ 덕에 가해자는 진주씨가 낸 탄원서 내용을 다 볼 수 있지만,

형사재판의 원고는 검사이므로,

피해자는 재판의 당사자가 아니라서 진주씨 자신은 가해자의 탄원서 내용을 볼 수 없어

대법원 앱에 가해자가 탄원서를 냈다는 사실이 뜰 때마다

내용도 모르면서 무조건 탄원서로 받아치기했다더군요.

가해자는 재판 자료를 열람 등사 가능하지만 피해자인 진주씨에겐 공소장 열람만 법원이 허가해줘서

결국 가해자 도주를 도와줘 피고인 신분이 되어 있는 가해자 전 여자친구와 친해져 재판 자료를 보았고,

나머지 재판 자료를 보려면 가해자에게 민사소송을 걸어 문서송부촉탁 신청을 하라는 법원 안내에 따라

민사 소송을 걸었더니, 그 바람에 주소 등 진주씨의 신상정보가 가해자에게 노출되어,

가해자가 진주씨 주소를 달달 외며 “두 배로 차서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하고 있다는 걸

가해자 감방 동기들이 출소해 제보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열람 신청한 CCTV 등 재판 자료는, 결국 1심이 끝나고야 손에 넣을 수 있어서,

CCTV에 7분간의 사각지대가 있는 걸 보고 성폭행 정황을 의심했을 때는

이미 추가 기소 등을 하기엔 시일이 많이 지나 있었다는 겁니다.

2024년 3월 6일 서울 조선일보미술관 조이. '싸울게요, 안 죽었으니까' 책 낸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 김진주씨가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김지호 기자

이 책의 클라이맥스는

진주씨가 언론, 범죄 관련 콘텐츠 유튜버, 네티즌 등의 도움으로

스스로 성범죄가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법원에 DNA 재검증을 요청해

가해자의 죄명을 살인미수에서 ‘강간 등 살인미수’로 바꾸는 부분입니다.

여성 입장에서 본인이 성범죄 피해자라는 걸 인정하고 만방에 알리는 건 정말 아픈 일인데,

가해자를 벌하기 위해, 그래서 그가 출소해 또 다른 피해자를 낳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악물고 그 일을 하면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요.

병원비 1000만원 때문에 범죄피해자구조금을 신청했는데, 서류가 누락돼 받지 못해

아버지가 적금을 깨야만 했고,

가해자는 국선변호사 선임이 가능하지만,

피해자는 성범죄, 아동 범죄 등만 국선 선임이 가능해

하는 수없이 변호사 선임비용을 24개월 카드 할부로 끊었다는 진주씨와

두 시간 가량 인터뷰하면서 가장 마음 아프고 기억에 남았던 말은

그가 판사들을 가리키며 두 번이나 이야기한 이 말이었습니다.

저 역시 배 부르고 호의호식하는 사람은 아닌가, 하는 반성

기자들은 약자들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하는 자책 등이 뒤섞여

미안하면서도 부끄러운,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2024년 3월 6일 서울 조선일보미술관 조이. '싸울게요, 안 죽었으니까' 책 낸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 김진주씨가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김지호 기자

우리 사법체계가 피해자보다 피고인의 권리를 중시하는 것에 대해 법원도 할 말이 있을 겁니다.

판사 출신 변호사 송민경의 책 ‘법관의 일’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책은 ‘의심스러울 땐 피고인의 이익으로(in dubio pro reo)’라는 로마법에 기반한 원칙이

형사재판의 대원칙이며,

‘한 사람의 무고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보다 열 사람의 범인을 놓치는 것이 낫다’는

영국 법학자 윌리엄 블랙스톤(1723~1780)의 말이 형사재판의 기본 이념이라 설명합니다.

법원이 피해자의 고통에 귀 기울이기보다 무고(誣告)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재판과정에서 배제하는 것은

이런 논리에 기반한다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블랙스톤의 말은 중대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열 사람의 범인을 놓치면 열 명 이상의 피해자가 생겨날 수 있을 텐데,

그들의 눈물은 누가 닦아줄 건가요?

블랙스톤이 살았던 18세기엔 과학수사의 미발달로 무고한 죄인이 많았겠지만

곳곳에 CCTV가 널려 있고, DNA감정과 디지털 포렌식이 가능한 현대에도 그의 말이 유효할까요?

법원이 아직도 이 낡은 이념을 기계적으로 고수한다면,

오판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핑계가 아닐까요?

블랙스톤의 조국인 영국에선 상황이 어떤지 궁금해

이코노미스트 한국 특파원 출신인 영국 작가 다니엘 튜더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고 했습니다.

김진주씨가 국가에 요구하는 것도

심신미약·반성·인정·가정환경·형사공탁 등을 이유로 감형하지 말며,

피해자의 보복범죄 공포에 비해 터무니없이 짧은 수감 기한을

100세 시대에 맞게 늘려 달라는 것입니다.

‘법에도 눈물이 있다’는 말은 이제 범죄자보다는 피해자에게 적용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간 우리 법원은 가해자들을 위해 충분히 많이 울었으니까요.

(서울=뉴스1) 황기선 기자 = '부산 돌려차기' 피해자가 2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의 대전고등법원 등에 대한 국정감사에 참고인으로 출석, 비공개 증언을 하고 있다. 2023.10.20/뉴스1

곽아람 Books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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