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과학자의 탄생

김근배·이은경·선유정 편저|세로북스|752쪽|4만9000원

수많은 어린이가 ‘과학자’라는 장래를 희망하던 시절에 어린 가슴을 뛰게 했던 것은 언제나 뉴턴이나 아인슈타인 같은 이름들이었다. 식민 지배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 과학의 초석을 놓은 선구자들의 삶은 좀처럼 접할 기회가 없었다.

전북대 과학학과 교수(김근배·이은경)와 과학문화연구센터 학술연구교수(선유정)인 저자들은 과학자들의 삶을 ‘우리 역사의 잃어버린 고리’로 본다. “한두 과학자의 기록은 에피소드일 수 있으나 많은 과학자의 기록은 역사적 서사가 된다. 한국 현대사는 산업화, 민주화와 함께 치열한 과학화의 역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탁월한 업적으로 한국 현대 과학을 이끈 자연과학자 30인의 삶을 열전(列傳) 형식으로 정리했다.

◇이민사와 함께 시작된 과학사

출생 연도순으로 구성된 과학자들의 삶 속에 한국 현대사의 궤적이 드러난다. 첫 순서는 훗날 북한 흥남공대 교수가 되는 리용규.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그가 미국에서 화학자가 된 결정적 계기는 1904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이민이었다. 노동을 그만두고 배움을 찾아 미 본토로 갔지만 근대 교육을 받지 못했던 탓에 스물다섯에 초등 2학년 과정에 편입해야 했다. 1917년 서른여섯에 네브래스카대학에서 조선인 최초로 화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46년 김일성종합대학 의학부장 시절의 정두현(왼쪽에서 둘째)이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정두현이 옹호한 유전학은 북한에서 “반동적 학문”으로 몰렸다. 1950년대 이후 그의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세로북스

분단된 남과 북에서 부자(父子) 과학자가 연구를 통해 간접 상봉한 일도 있었다. 조류학자 원병오(전 경희대 교수)는 1963년 철새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기 위해 북방쇠찌르레기에 일본제 표식을 달아 날려 보냈다. 2년 뒤 새는 평양에서 발견됐다. 한반도 조류 연구를 집대성한 북한 생물학연구소장 원홍구는 일본에 서식하지 않는다고 알려진 새가 일제 표식을 달고 날아오자 의아하게 생각했다. 일본 학계에 문의한 끝에 새를 날려보낸 이가 6·25 때 헤어진 막내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 사연은 한국과 일본, 북한에서 책과 영화로 소개됐다.

일제강점기에 과학자가 되려는 조선인은 바늘구멍 같은 기회를 잡아 해외로 나가야 했다. 50대까지 일본·대만에 세 차례 유학하며 농학, 생물학, 의학을 공부한 정두현, 조선인 여성 최초로 제국대학 이공계에 진학해 한국 첫 여성 농학 박사가 된 김삼순, 두만강 모래에서 다이아몬드 원석을 발견해 동아시아에는 다이아몬드가 없다는 통설을 뒤집은 박동길, 세계 최초로 비타민E 결정체 추출에 성공해 1930년대 이미 신문에서 ‘노벨상 후보’로 지목한 김량하…. 전공 분야는 각자 달라도 과학자들의 삶에는 남다른 열정으로 차별과 궁핍을 이겨내고 세계 수준으로 나아갔다는 공통점이 있다. 때로 약간의 행운이 주어지기도 했지만, 황무지 같은 현실에 길을 낸 개척자들의 서사이기에 울림을 준다.

해방 후에도 과학계의 현실은 시작부터 험난했다. 1946년 미군정이 경성제국대학과 여러 전문학교를 통합해 국립서울대학교를 설립하는 방안(국대안)을 추진하자 과학계는 찬반을 둘러싸고 분열했다. 좌우 대립까지 겹쳐 동맹휴학과 시위가 이어지는 ‘국대안 파동’이 일어났다. 혼란 속에 많은 학자가 학교를 떠났고 일부는 해외로 나가거나 월북을 택했다. 많은 과학자의 이름이 그렇게 잊혔다.

◇현대 한국인의 삶에 스며든 과학

정치·경제 위주의 익숙한 시각에서 벗어나 한국 현대사를 과학의 측면에서 바라보게 해준다. 예컨대 지질학자 김옥준이 주도한 ‘태백산 지구 지하자원 조사 사업’(1962)은 박정희 정부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강조한 석탄 증산의 이론적 토대가 됐다. 물리학자 이상수는 원자력연구소장·원자력청장을 지내며 국산 원자로 개발의 토대를 닦았다.

한국인의 삶에 녹아 있는 과학의 흔적도 책 곳곳에서 발견된다. 양력 사용을 강조했던 천문학자 이원철은 ‘가갸날’ 날짜(음력 9월 29일)를 양력으로 환산해 한글날이 10월 9일로 정착되는 과정을 이끌었다. 식물학자 정태현은 한반도의 식물 2000여 종의 이름을 확립한 ‘조선식물향명집’(1937)을 펴내는 데 참여했다. “민들레, 쑥, 엉겅퀴, 국화, 과꽃, 백일홍 등 지금 우리가 부르는 많은 이름이 이때 확정된 것이다.”

이 책은 이공계 전 분야를 아우르는 ‘한국 과학기술 인물 열전’ 시리즈의 첫 권 ‘자연과학편’이다. 이어 공학 기술, 정책 문화, 의약학, 농림축수산학, 북한 편을 추가로 내고 편별로 약 30명씩 다룰 계획이다. 총 200명에 달하는 선구자의 이야기로 완성될 한국 현대 과학사를 기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