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패트릭 브링리 지음|김희정·조현주 옮김|웅진지식하우스|360쪽|1만7500원
패트릭 브링리(41)의 에세이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웅진지식하우스)의 국내 시장 반응은 이례적이다. 해외 무명 저자의 첫 책인데, 지난해 11월 출간돼 현재까지 16만8000부 팔렸다. 온라인 서점 알라딘에서 올 상반기 가장 많이 팔린 책이며, 교보문고 종합 베스트셀러 2위, 예스24에선 3위를 차지했다.
‘뉴요커’ 직원이었던 저자가 2008년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계기로 직장을 그만두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하 ‘메트’) 경비원으로 취직해 10년간 이어간 애도의 여정을 그린 이 책은 무겁고 진지하다. 미술품과 관련된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데 그림 한 장 실리지 않았다. 유명 영화평론가의 추천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론 꾸준한 인기를 설명하긴 힘들다. 브링리를 이메일로 만났다.
◇형 잃은 슬픔에 ‘뉴요커’ 관두고 메트 경비원 돼
-한국 독자들은 상처와 결함까지 드러내는 미국식 에세이에 익숙하지 않다. 그런데도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는 뭘까.
“주변의 몇몇 한국인들이 내 책이 왜 한국서 인기 있는지에 대한 이론을 제시했다. 한 분은 스트레스가 심하고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는 지인들이 일상의 고민과 야망을 잊은 채 삶의 속도를 늦추고 세상의 신비한 아름다움을 곱씹는 내용의 이 책에서 탈출구를 찾더라 말하더라. 학문과 학식을 중시하는 한국 문화에선 예술에 대해 의견을 표명하려면 표준화된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내가 ‘매우 미국적이며, 진짜 뉴요커’라고 말하는 분도 있었다. 인생은 한 번뿐이니 예술의 모든 측면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더라도 그 안에 들어가 최선을 다해 의미를 끌어내야 한다는 것이 내 인생 철학인데, 한국 독자들이 그런 점을 놀랍고 고무적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고 하더라.”
-형을 잃은 후 왜 하필 미술관 경비원으로 취직했나.
“사내 정치라든가 승진 사다리 같은 사소한 것들을 생각해야 할 사무실로 서둘러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 한동안은 그저 가만히 서 있고 싶었는데,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장소에서 프로페셔널하게 가만히 서 있을 수 있는 이 놀라운 직업을 찾은 거다.”
-화이트칼라가 택할 법한 일은 아닌데.
“아이러니하게도 ‘뉴요커’에서 문화 사업 관련 일을 할 때보다 지적인 자극이 더 컸다. 권위 있는 잡지사에 다녔지만 하루의 대부분을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이메일에 답하면서 보냈다. 미술관 경비원으로서 나는 예술과 교감하고, 예술에 대해 다방면으로 온갖 생각을 하고, 사람들을 지켜보고, 대화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생각의 깊이도 그렇고 글 쓰는 이로서, 한 인간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여지가 더 많았다.”
-10년이나 그 일을 할 수 있었던 동력은.
“아름다우면서 정직하고, 쓸모 있는 직업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게다가 메트 컬렉션은 무궁무진해서 100년간 있었다 해도 다 감상하지 못했을 거다.”
◇미술관은 일상과 분리된 ‘치유의 사원’
-결국 예술작품을 통해 상실의 아픔을 ‘치유’한 이야기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결코 간단한 과정은 아니었다. 미술관은 사원과 매우 비슷하다. 일상과 분리된 신성한 장소이며, 발길을 늦추고 멈춰 숭배하고, 경배하고, 질문하고, 경탄하고, 성찰하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그래서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여러 작품들을 보며 인간이 수천 년 동안 삶과 죽음, 고통에 대해 생각해 왔다는 사실, 그래서 결국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도 도움이 되었다. 살다 보면 사소한 걱정거리에 사로잡히기 쉽다. 그래서 나는 미술관으로 회귀하고, 또 회귀한다. 더 크고, 더 낯설고, 더 아름답고, 더 근본적인 것들을 상기하고 싶어서.”
-메트란 당신에게 어떤 곳인가.
“맨해튼 중심부의 네 블록을 차지하고 있는 메트는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세계 곳곳에서 만들어낸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이들은 인류의 기술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며, 인간이 우주의 신비와 찬란함에 대해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의 지표이기도 하다.”
-메트 컬렉션 중 당신에게 가장 위로를 준 작품은.
“너무 많지만 서양 미술 최초의 진정한 풍경화로 꼽히는 피터 브뢰겔의 ‘수확하는 사람들’(1565)을 고르겠다. 16세기 네덜란드에서 화가 주변에 있었을 법한 농촌 풍경, 즉 밭을 갈고 있는 농부들의 모습을 그린 단순한 그림이다. 그러나 화가는 오랜 시간 그 풍경에 관심을 기울이고 자기 것으로 흡수해, 찬란한 금빛과 녹색, 먼 지평선을 향해 역동적으로 뻗어 나가는 곡식들을 표현함으로써 간결한 웅장함을 부여했다. 전경에는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면서 낮잠 자고, 수다 떨고, 배나무 아래에서 밥을 먹는 아홉 명의 농부들이 있다. 이 농부들은 약간 우스꽝스럽게 그려져 있지만 매우 인간적이고 정이 가는데, 나와 당신, 그리고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세상이 주변에 펼쳐져 있는 동안, 친구나 사랑하는 이들과 빵을 나누고, 작은 기쁨과 동료애를 찾는 것 외에 인생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또 뭐가 있을까? 위대한 그림은 종종 ‘너무 많은 것’을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것처럼.”
-미술사 지식이 상당한데, 대학에선 뭘 공부했나.
“뉴욕대 자유전공학부에서 인문학을 전공했다. 영문학, 고전, 종교학, 미술사 등의 수업을 들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미술사 지식은 경비원으로 일하며 작품을 보고, 대화를 엿듣고, 관람객 및 동료 경비원들과 작품에 대해 토론하면서, 그리고 물론 독서를 통해 얻었다.”
-미술관 문턱을 높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일단 안으로 들어가 최선을 다하라. 전문가들 말에 겁 먹고 메트 같은 곳이 출입 금지 구역이라 생각하지 말아라. 메트가 소장한 모든 작품에 대한 전문가는 없다. 관장조차도 광대한 소장품 중 일부에 대해서만 알 뿐이다. 예술이란 삶과 죽음, 고통, 그리고 하늘의 별 아래 있는 모든 것을 다룬다. 세상에 그걸 다 아는 사람은 없다. 짧은 인생에서 의미를 찾는 건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미술관은 세상에 대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아주 단순하고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 우리가 뭘 가치있게 여기는지, 뭘 믿는지 생각할 수 있는 훌륭한 장소다.”
◇경비원 그만두고 메트 투어 가이드로
-책을 내고 인생이 많이 바뀌었나?
“예전엔 생계를 위해 조용히 지냈는데, 지금은 생계를 위해 말하고 또 말하고 또 말한다! 미술관을 그만둔 후 도보여행 가이드로 일하며 다양한 투어를 진행했는데 요즘은 메트에서만 투어를 이끌고 있다. 메트에서 한국 분들이 나를 알아본 적도 몇 번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퍼블릭 투어를 이끌고, 그보다 더 자주 내 책을 읽고 연락한 분들을 위한 프라이빗 투어를 진행한다. 조용히 사색하고 글 쓰는 시간을 따로 마련하려고 노력하지만 예전보다 어렵다. 그래도 내 삶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가족과 함께하며, 아빠로서 의무를 다하면서 브루클린의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 그래도 여행을 다니면서 멋진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있고, 언젠가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어떻게 책을 내게 됐나.
“메트에서 6~7년 일하고 나니 뭔가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책 한 권이 될 줄 몰랐고, 그냥 예술에 관한 에세이를 쓰려고 했다. 하지만 점차 내게 사람들이 흥미를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1인칭 시점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위대하고 거대한 세상의 대단한 장소에서 고독한 개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으니까. 어떤 목소리와 톤으로 책을 써야할지 생각하느라 몇 년 동안 노트에 낙서만 하며 보냈다. 출판계에 아는 사람도 없고 막막했지만, 그렇게 시작해 에이전트를 찾을 수 있었고, 운좋게도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다른 책을 쓸 계획은?
“새 책을 작업 중인데 예술과 관련된 내용이다. 또한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를’ 1인극으로 각색하고 있다.”
-책의 원제는 ‘All the Beauty in the World(세상의 모든 아름다움)’다. 한국어 제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한국에서 이 책이 워낙 잘 팔렸기 때문에 미국 편집자와 농담 삼아 제목을 그렇게 정했어야 한다고 했다! 매우 직관적이고 책의 내용을 정확히 알려주니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한국 책 표지에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라고 영어로 적혀 있기 때문에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두 가지 제목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당신처럼 소중한 사람을 잃고 힘들어 하는 이들에게 건네고 싶은 말은.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당신이 겪고 있는 고통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 중 하나일 뿐이다. 주변 사람들, 그리고 오래전에 죽은 이들과도 유대감을 가져라. 수천 년에 걸쳐 여러 문화권에서는 당신이 겪고 있는 일을 매우 아름답고 매우 고통스럽게 표현해 왔다. 그들이 남긴 것에서 공감대를 찾고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