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파의 시간
커털린 커리코 지음|조은영 옮김|까치|338쪽|1만8000원
2023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커털린 커리코(69)의 이 회고록은 가난한 헝가리 푸주한의 딸이 타고난 머리와 성실성에 힘입어 갖은 역경을 이겨내고 코로나 바이러스에서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 되는 이야기다. 커리코는 일찍부터 mRNA 연구에 몰두했지만, 학계의 관심사와는 거리가 먼 주제라 연구비 지원, 논문 게재, 교수 승진 등에서 소외된다. 1980년대 중반 일자리를 찾아 미국으로 떠난 커리코가 미화 50달러 이상 반출을 금하는 헝가리 당국의 눈을 피해 두 살짜리 딸이 애지중지하던 곰인형 배 속에 전 재산 1200달러를 숨겨 몰래 갖고 온 이야기는 그의 노벨상 수상과 함께 이미 ‘전설’이 됐다.
◇인생을 바꾼 책 ‘생명의 스트레스’
고난에 처한 이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책의 힘’이 회고록의 큰 줄기다. 고등학교 때 생물 선생님이 권한 한스 셀리에의 ‘생명의 스트레스’(1956)가 커리코에게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이 된다. 내분비학자 한스 셀리에는 ‘스트레스’라는 생물학적 개념을 명명한 인물. “셀리에는 내가 바라던 사고방식, 즉 원대한 질문을 정의하고, 그것을 목표로 삼아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명확하고 구체적인 답변을 추구해가는 방식을 말하고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커리코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지각하고 대응하느냐에 따라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제약 회사가 연구비 지원을 끊어 연구소를 그만둬야만 했을 때 커리코는 책 내용에 기대 마음을 다스린다. “남을 탓하지 말자. 대신 지금 내 힘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자. 나쁜 스트레스를 좋은 스트레스로 바꾸자.” 이직하려는 커리코를 미국서 추방하겠다고 협박한 상사에게도 복수의 칼날을 가는 대신 그가 해준 일에 감사한다. “복수는 오직 복수를 낳고 끝없이 반복된다. 스트레스를 완화하여 자신의 삶이 손상되지 않고 나아지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더 나은 방법이 있다. 바로 감사하는 것이다.”
◇형사 콜롬보의 교훈 ‘한 가지만 더’
드라마 속 주인공 ‘형사 콜롬보’ 또한 커리코의 롤 모델이었다. 용의자에게 속아 넘어가는 것 같다가 갑자기 “한 가지만 더(just one more thing)”를 외치며 결정적 증거를 들이민다는 점이 그랬다. “어떻게 하면 염증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변형된 mRNA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라는 커리코 평생의 과제가 해결된 것은 ‘한 가지만 더’에 힘입어서다.
실험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영어도 잘 못하는데 낯선 미국서 이민자로 살아남아야 할 때, 세계적인 학술지에 논문이 실렸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을 때, 자금 조달을 못 해 온다고 대학에서 실험실을 치워버렸을 때…. 커리코에겐 ‘한 가지만 더’가 있었다. “한 가지만 더. 그것이 내가 점점 더 나아진 비결이었다. 질문 한 가지만 더, 실험 한 번만 더, 한 가지만 더 생각해보자, 내가 할 수 있는 과제 한 가지만 더 시도해보자. 나는 읽고, 또 읽고 그런 다음 다시 시작했다. 나는 외우고, 방금 공부한 것을 시험해 보고, 그런 다음 확실하게 이해할 때까지 더 공부했다. 또 하고, 또 하고, 한 가지만 더, 한 번만 더.”
◇워킹맘 성공 뒤엔 연하 남편의 외조
커리코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인물이지만 책은 헝가리 사회의 이점을 부각한다. 학창 시절 그의 모든 기록엔 이름 옆에 F가 적혀 있었다. F는 헝가리어로 ‘육체(fizikai)’라는 뜻. 이는 커리코가 육체노동자의 자녀임을 뜻한다. 커리코는 ‘F의 지위’ 덕에 많은 기회가 주어졌다고 회상한다. “공산주의 헝가리에서 F는 교육자들이 나에게 추가로 신경을 써주겠다는 뜻이다. 당은 노동계급의 승격을 원했기 때문에 엘리트 자녀라면 좀 더 쉽게 얻을 기회를 우리 같은 아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제공했다.”
커리코의 딸 수전 프런치어는 2008년 베이징, 2012년 런던 올림픽서 금메달을 딴 조정 선수. 워킹맘으로서 커리코는 말한다. “오늘날 사람들이 내게 여성이 좋은 엄마이자 성공한 과학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물을 때가 있다. 답은 간단하다. 내가 헝가리에서 누렸던 것 같은 수준 높고 저렴한 보육 시설이다.”
주말부부를 하면서 딸의 주양육자가 되었던 남편 벨러 또한 큰 힘이었다. 고졸 기술자에 다섯 살 연하인 벨러와의 결혼을 어머니는 우려했다. “지금이야 너와 벨러가 서로 비슷해 보이지. 하지만 네가 마흔다섯이 되면 상황이 달라질 게다. 여자 마흔다섯은 중년이야. 하지만 마흔 살 남자는 아직 팔팔한 청춘이지.” 어머니의 말에 커리코는 응수한다. “그럼 엄마, 내가 마흔다섯이 되면 벨러랑 이혼할게.”
코로나를 겪으며 우리 모두가 습득한 mRNA 백신에 대한 기초 지식만 있으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 감동과 재미를 함께 갖췄다. 원제 Breaking Through.